▶︎ 1932년
백남준은 1932년 7월 20일(음력 6월 17일), 서울 서린동 지금 서린호텔 자리에서 당시 태창방직을 경영하던 백낙승과 조종희의 3남 2녀 가운데 막내로 태어났다. <우연한 만남>, <만남의 신비>에 의미를 부여하는 백남준은 1928년 같은날에 Jacqueline Kennedy Onassis가 출생했고, 1969년 같은날이 미국의 우주비행사가 처음으로 달에 착륙한 역사적인 날이라고 강조한다.
아버지 형제 4세대가 서린동 대가에서 함께 기거하며 부유한 생활을 누렸다. 어느날은 어머니와 큰어머니 세분을 비롯한 집안의 여자들이 심심풀이로 일부는 男裝을하고 집앞 금강사진관에서 사진을 찍었다. 재미있는 사진이라고 사진관 주인이 쇼윈도에 진열하는 바람에 모두들 부끄러워 한동안 외출을 삼갔다고 백남준 작은 누님 백영득 여사가 전한다.
백남준은 어려서부터 피아노치기를 좋아했고 정능 별장에 있던 피아노를 가끔 칠 수 있었다고 한다. 어느날은 무슨 연유이었던지 아버지께서 피아노를 못치게 꾸중하셨기때문에 7살난 백남준은 별장 앞마당에 피아노 건반을 그려놓고 땅을 두드렸다고 한다. 이것이 백남준의 최초 행위음악 ?
▶︎ 1945년
경기중학에 입학하여 홍콩으로 떠날때 까지 신재덕에게 피아노를, 이권우에게 작곡을 사사받는다.
▶︎ 1949년
아버지와 함께 홍콩으로 건너가 현지의 Royden School에 입학한다; 홍콩에 가서 홍콩 인삼 수출의 총 대리인이 된다. 이승만 대통령이 미국과의 교제비로 쓸 달러가 필요한데 외화를 벌 수 있는 방법은 인삼 수출밖에 없다면서 아버지를 홍콩으로 보낸 것이었고, 백남준은 아버지의 통역 자격으로 따라가게 된 것이다. 백남준의 여권번호는 7번이었고 아버지는 6번이었다. (최일남, <신동아> 1984년 8월호)
▶︎ 1950-51년
아버지와 함께 서울의 조카 (형의 아들) 백일 잔치를 보러 귀국하였다가 6.25 사변을 만난다. 백씨 일가는 모두 부산으로 피난을 떠났다가 1951년 일본으로 건너간다. (최일남, <신동아> 1984년 8월); 백남준은 동경제대에 입학하여 미학 및 음악사, 미술사를 전공한다.
▶︎ 1956년
Arnold Schonberg에 관한 논문으로 동경제대를 졸업하고, 가족과 헤어져 독일 유학길에 오른다; 백남준은 빠리로 유학가고 싶었으나 그곳은 데까당한 곳이라 좋지 않다고 부모가 반대하는 바람에 진지한 독일 뮌헨으로 떠난다. (P. Gardner, <Artnews> 1982년 5월); 칼카타와 카이로를 경유하여 뮌헨에 도착, 현지의 University of Munich에 입학하고 일년간 Thrasybulos Giorgiades밑에서 음악사를 공부.
▶︎ 1957년
다름슈타트 하기강좌에 참석하여 Karlheinz Stockhausen과 Luigi Nono 만난다.
프레이부르그의 Conservatory of Music 에 입학하여 Wolfgang Fortner에게 작곡을 사사받는다. 이당시 <String Quartet>작곡.
<Bauhause of Music>이란 논고를 동경 <음악예술>잡지에 발표.
▶︎ 1958년
John Cage 만나다: 다름슈타트의 신음악을 위한 하기강좌에 참가, 그 과목을 맡았던 John Cage와 그의 동료 David Tudor 만난다. 케이지와의 만남은 백남준 예술과 인생의 방향을 바꾸게한 백남준 생애의 가장 뜻깊은 일로 기록된다.
쾰른으로 이사하여 University of Cologne에 입학.
Stockhausen이 작업하던 Westdeutsche Rundfunk 전자음악 스튜디오에 들어가 전자음악을 연구.
<The Music of 20.5 Century>라는 논고와 당시 빠리 음악계 동향과 具體음악을 소개하는 글 <A Report on the Paris Studio of Pierre Schaeffer and Musique Concrete>을 서울 자유신문에 발표.
▶︎ 1959년
백남준의 데뷔 해프닝 작품 <Homage to John Cage: Music for Tape Recorder and Piano> 초연, Jean-Pierre Wilhelm의 Galerie 22, 뒤셀도르프 (11월 13일): 그를 일약 아방가르드 스타로 만든 이 작품을 헌정한 케이지는 참석치 못했고, 당시 독일에 있던 작곡가 윤이상씨가 이공연을 관람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또한 백남준이 모르고 있는 사이 앞으로 백남준과 각별한 우정을 나눌 Joseph Beuys가 이 공연을 지켜보고 있었다.
당시 Galerie 22는 모든 화가들의 동경의 대상이었고, 아방가르드 예술의 열렬한 옹호자였던 Wilhelm은 3번이나 백남준 생애의 전환점을 만들어준 은인이었다. 1967년 그가 심장병으로 사망했다는 소식에 백남준은 묘소를 찾아가 2마르크 짜리 화분 2개를 놓고 온다. 갤러리 22를 기념하기 위하여.(백남준, <Beuys Vox> 1989)
▶︎ 1960년
그룹공연 <Music, Text, Painting, Architecture>에 참가, <Homage to John Cage>재연, Mary Bauermeister 아트리에, 쾰른 (3월 26일): 이 공연에서 백남준은 Christo를 처음 만나게 되는데, 이것을 인연으로 크리스토는 1962년 백남준의 피아노 두대를 광목으로 싸서 전시하게된다. 그 두대의 피아노는 원래 백남준이 동료 음악가 Benjamin Patterson에게 빌려준 것인데, 크리스토가 그것을 하얗게 칠하고 광목으로 싸서 작품으로 출품하였던 것이다. 나중에 피아노를 돌려받고 백남준은 투덜대며 광목을 벗겨버렸는데 그 피아노들은 지금 흰칠이 묻은채 빈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다. (백남준, <Beuys Vox> 1989)
마리 바우어마이스터는 자신의 아트리에를 공연장으로 개방한 예술가로서 후에 스톡하우젠과 결혼한다. 그녀는 특히 백남준의 예술을 이해하고 많은 지원을 하는데, 백남준이 뉴욕으로 이사한 후에도 뉴욕의 Bonino화랑을 소개해 주어 백남준은 그곳에서 수차례의 전시회를 갖게된다.
여름에 동경여행을 하면서, <Serie, Hasard, Espace, Apres Serie>라는 글을 동경 <음악예술>잡지에 발표.
<Etude for Pianoforte> 초연, Mary Bauermeister 아트리에, 쾰른 (10월 6일): 공연중 객석으로 나아가 케이지의 넥타이를 자르는 기행으로 백남준은 음악적 테러리스트라는 호칭을 얻고, 이 공연은 해프닝 사상 가장 <악명>높은 사건으로 남는다. 백남준은 객석의 케이지와 튜더에게 공격을 가하면서 그들과 함께 앉아있던 스톡하우젠을 가해의 대상에서 제외했는데, 그 까닭은 스톡하우젠과 전자음악에 대하여 이제 더 이상의 관심이 없어져 공격할 가치가 없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 1961년
<University of Avant-Garde Hinduism>이라는 독자적 예술운동을 시작.
그룹공연<Simultan>에 Vostell, Stefan Werverka등과 함께 참가, 다수 작품 공연, Galerie Laulus, 쾰른(6월).
이해 여름 뒤셀도르프에서 요셉 보이스 만나다: 백남준은 Schmela 화랑에서 열린 Zero 그룹 개막식에 갔다. 이때 눈초리가 매서운 이상한 중년 남자가 “파이크”하고 부르더니, 1959년 백남준의 데뷔공연(Homage to John Cage)이 아주 인상적이라고 칭찬하고는 다음 어느 공연에 참석해 달라고 부탁하였다. 그가 보이스였다. 보이스와 백남준이 만나는 이 장면이 사진사 Manfred Tischler의 앵글에 포착되었고 이사진이 제로 그룹 카타로그에 실렸기 때문에 오늘날까지 이 사진이 남아있다. (백남준, <Beuys Vox> 1989); 문제의 이 사진이 1989년 현대화랑이 발행한 <Beuys Vox>의 표지에 다시 실렸다.
<Action Music>이라는 공연에서, <Read Music-‘do It Yourself’-Answers to La Monte Young>, <Simple>등 초연, Liljevalchs konsthall, Stockholm(9월 18일). 또한 오슬로 Ny Musikk와 코펜하겐 Louisiana 미술관에서도 공연 (9월 27일): <Simple>은 콩을 던지고 쉐이빙크림을 바르고 욕조에 들어가 몸을 적시는 행위음악.
Stockhausen의 음악적 연극 <Originale>에 참가, <Zen for Head>, <Etude Platonique No.3>등 초연, Theatre am Dom, 쾰른 (10월 26일): <Zen for Head>에서 백남준은 머리를 붓으로 사용하여 먹물 묻은 머리로 바닥을 기어가며 그림을 그렸다. 다음해 비스바덴 미술관에서 개최된 플럭서스 페스티발에서 백남준이 이 작품을 재연했는데 그때 그려진 <묵화>가 먹물 묻은 넥타이와 함께 현재 비스바덴 미술관에 전시되어 있다; 1985년 덴마크 로스킬드에서 플럭서스 페스티발이 열렸을때, Ben Vautier가 백남준의 <Zen for Head>를 재연하였다. 무대부터 복도 밖 까지 깔아놓은 화선지 위를 기어가며 벤은 표현주위적 몸짓으로 열연했는데, 플럭서스에서는 무명성의 정신으로 다른 사람의 작품을 공연하는 것이 일반화 되어있다.
백남준은 이즈음 독일 아방가르드 그룹에 소개되어, Decollage 창시자 Wolf Vostell, 구조시인 Emmett Williams, 음악가 Benjamin Patterson등과 교분을 갖게된다. 백남준이 보스텔의 데꼴라쥬 신문 발행을 돕는 일이 이때부터 시작되어 1964년 까지 계속된다; 윌리엄즈는 처음 백남준을 만나던 때를 회상하며, “그가 나에게 무엇인가 말을 했을때 나는 일본말을 모른다고 했더니 그는 다시 독일어로 나는 조금전에 영어로 말 했는데요 해서 둘은 무척 당황했었다“고 전하고 있다.(E. Williams, <How We Met> 1976)
Maciunas를 만나다: 플럭서스 조직자 마키우나스는 리튜아니아 태생의 건축학도로, 1961년 케이지 후임으로 뉴욕의 뉴스쿨에서 강의를 맡았던 맥스필드 밑에서 음악을 공부하면서 예술가들과 친분을 갖게된다. 마키우나스는 1961년 3월부터 7월까지 본인이 운영하던 AG 화랑에서 일련의 공연들을 벌이는데, 이 AG 팀의 공연과 Yoko Ono 화실에서 열리는 La Monte Young 중심의 공연 시리즈가 미국내에서의 플럭서스 태동을 반영하는 최초의 움직임들이었다. 마키우나스는 매일 저녁의 공연외에도 예술잡지 발간의 꿈을 키워오던 중, 라 몬테 영과 잭슨 맥로우와 함께 <An Anthology>라는 플럭서스 전신 출판물을 만들게된다. 이책이 출판되기 이전인 1961년 그는 뉴욕을 떠나 플럭서스 역사가 전개될 유럽을 방문하는데 그때에 백남준을 만나게 되는 것이다.
마키우나스는 유럽을 방문하기 전에 플럭서스를 조직하기 위하여 유럽에 있는 시인 Helms, 작곡가Bussotti, 그리고 백남준에게 그러한 내용의 편지를 보냈었다. 그 시인과 작곡가는 답장조차 하지 않았으나, 백남준은 이에 호응하여 플럭서스가 결성될 수 있었다. (백남준, <Beuys Vox>)
▶︎ 1962년
Parnass 화랑 그룹전에 마키우나스, 패터슨 등과 함께 참가, Ted Curtis작품에 단역으로 출연한다. 부퍼탈 (6월 9일).
다다적 음악공연 <Neo-Dada in der Music>에 마키우나스등과 함께 참가, <One for Violin Solo>, <Sonata Quasi Una Fantasia>, <Smile Gently(Etude Platonique No. 5)>, <Bagatelles Americans>등을 초연, Kammerspiele, 뒤셀도르프 (6월 16일): <One for Violin Solo>는 바이올린을 가만이 들어올렸다가 밑으로 내려쳐 깨트리는 단순한 음악적 <사건>이다. 바이오린을 파손시키는 이 작품도 <장치된 피아노>와 마찬가자로 플럭서스 음악의 대표적 레퍼토리를 이루며, 많은 동료 예술가들에 의해 재연되었다; <One for Violin Solo>를 초연할 당시 뒤셀도르프 시립관현악단 단장이 관람하고 있었는데, 백남준이 봐이올린을 깨려는 순간 그 악기를 살려달라고 고함을 쳐서 보이스와 뒤셀도르프 미대교수 Konrad Klapheck가 그 악기 옹호자를 몰아내는 소동을 벌였다. 그러나 공연중인 백남준은 아무것도 모르고 바이올린을 무사히 깰 수 있었다고 한다. (백남준, <Beuys Vox>)
플럭서스 최초의 공연행사인 <Fluxus International Festival, New Music>에 참가, <Danger Music for Dick Higgins>초연, <Simple>, <Homage to John Cage>, <Etude for Pianoforte>등 재연, Horsall Stadtischen Museums, 비스바덴 (9월 1-23일): 백남준을 통해 독일 아방가르드들을 소개받은 마키우나스는 그들과 당시 독일을 방문중인 Dick Higgins, Alison Knowles 부부를 한데 모아 플럭서스라는 이름을 내건 최초의 공연 행사를 벌이게 된다. 이 행사는 플럭서스라는 이름의 잡지 발행의 꿈을 버리지 못한 마키우나스가 다시 잡지발행을 게획하고 그 부수행사로 주관한 것인데 잡지는 출판되지 못하고 공연만이 치루어져 그것이 플럭서스의 첫 공식행사가 된 것이다. 비스바덴 페스티발 참가자는 Eric Anderson, George Brecht, Giuseppe Chiari, Philip Corner, Jean Dupuy, Robert Filliou, Jeoffrey Handriks, Benjamin Patterson, Willem de Rider, Takeko Saito, Ben Vautier, Emmett Williams, 백남준.
<Parallel Events of New Music>에서, 알리슨 놀스와 관객없이 은밀하게 공연한 <Serenade for Alison> 초연, E. Williams와 길거리에서 공연한 <Living Theatre No. 1>초연, Kunsthandel Monet, 암스테르담.
플럭서스 행사 <Festum Fluxorum Fluxus>에 참가, <Music for the Long Road>초연에서 Knowles와 관객없이 공연, Nikolai 성당, 코펜하겐 (11월 23-28일).
<Music for High Tower and Without Audience>초연에서 knowles와 에펠탑에 올라가 아무도 모르게 공연, 빠리.
<Festum Fluxorm Fluxus>>에 참가, <To be Determined>초연, <One for Violin Solo>등 재연, American Artists Center, 빠리 (12월3-8일).
<Decollage> 해프닝에 참가, <Danger Music for Dick Higgins>등 공연, 쾰른.
<Decollage> 신문 3호에 <About Music>, <Serenade for Alison>, <Young Penis Symphony>등 음악 스코어 발표.
그룹전 <Music Notation>에 참가, Minami Gallery, 동경.
그룹전 <Notations>에 참가, Galleria La Salita, 로마.
당시 백남준의 모습이 어떠했는지, 마키우나스가 1962년 1월 18일 히긴스에게 보낸 편지를 보면 상세히 드러난다: ”백남준은 키도 작고 머리카락은 보리밭같이 삐죽 올라섰다. 겨울에도 샌들을 신고, 목도리를 눈 밑까지 하고 다닌다. 누구에게나 할로 할로 하면서 인사를 하고, 뉴욕 사람들과는 다르게 대단히 겸손하다. 그는 또 영어와 독일어를 일본말처럼 하는데 처음에는 거의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Maciunas, <Fluxus Codex>)
▶︎ 1963년
<Festum Fluxorum Fluxus>에 참가, <Prelude in D-minor>, <Fluxus Champion Contest> 초연, Staatliche Kunstakademie, 뒤셀도르프(2월 2일 – 3월 3일).
백남준 첫 비디오 개인전 <Exposition of Music: Electronic Television>, Galerie Parnass, 부퍼탈 (3월 11일 부터): 3대의 <장치된 피아노>, 13대의 <장치된 TV>와 함께 피가 뚝뚝 떨어지는 갓잡은 황소 머리를 전시하였던 문제의 전시회; 이 전시 초대일에 Joseph Beuys는 난데없이 도끼 한자루를 들고 나타나 전시중인 피아노 한대를 부수어버린 일화를 남기고 있다. 백남준은 보이스가 그 도끼를 집에서부터 들고 나온 것인지, 그 화랑에서 구한것인지 아직도 알 수가 없다고 한다. (백남준, 원화랑 Beuys 전시회 카타로그 1987)
<Fluxus Festival>에 참가, <Piano for All Senses>초연, Amstel 47,(6월 22일); Theatre Hypokriterion 에서도 공연 (6월 23일), 암스테르담.
<Fluxus Festival of Total Art>에 참가, 다수 작품 공연, Kotel Scribe, 니스(7월 25일 – 8월 3일).
백남준 자신의 작품 해설을 담은 논고 <To the Symphony for 20 Rooms>를 플럭서스 출판물 <An Anthology>에 발표.
스코어 <Read Music-‘Do it Yourself’-Answer to La Monte Young>를 <Pop Art Do IT Yourself>라는 책에 발표.
일본 공연여행을 떠나다:
일본 공연에서 <Prelude in E-flat Major>, <Hommage a Johm Cage>), <Etude for Pianoforte>, <Simple>등 발표, 草月 아트홀, 동경: 이당시 전자 기술자들인 Hideo Uchida와 Shuya Abe를 만나고 아베와 <로로트 K-456>을 제작한다. 또한 동양음악을 공부하고 Kamakura사원에 3일간 머물며 선불교를 경험한다; 이 여행의 또하나의 수확은 장차 부인이 될 Shigeko Kubota 를 만난 것.
▶︎ 1964년
뉴욕으로 가는 길에 하와이에 들러 Lieberman만과 관객없이 공연, 와이키키해변, 호놀루루.
6개월 정도의 방문으로 생각한 뉴욕여행이 뉴욕 정착으로 바뀌었다. 1964년, 뉴욕에 도착하자 딕 히긴스가 퀸스 대학 영어교수며 소설가인 William Wilson을 소개하여 그의집 Chelsea 타운하우스 꼭대기 층에 세들게 주선하였다. 그 당시 백남준은 일본에서 형이 보내주는 일본 판화및 책으로 집세를 물어야 하는 형편이었다. (Gardner, <Artnews> 1982년 5월호); 나중에 소호 Mercer street에 자리잡고 마키우나스와 이웃으로 지내고, Charlotte Moorman을 만난다; 무어맨은 쥴리어드를 졸업한 후 Leopold Stokowski가 지휘하는 American Symphony Orchestra에서 첼로 주자로 활약하다가 60년대 초 요꼬 오노와 같은 방을 쓰면서 아방가르드에 노출된다. (Gardner, <Artnews> 1982년 5월)
<Fluxus Concerts>에 참가, <Prelude for Audience>, <One for Violin Solo>(마키우나스가 공연), <Zen for Film>, <Street Composition to be Unveiled>등 공연, Canal Street, 뉴욕(4월 11일 – 5월 23일).
<Fluxus Concert>에 참가, <One Third for Violin> 공연, Carnegie Recital Hall, 뉴욕 (6월 27일).
<Fluxus-a Little Festival of New Music> 에 참가, <One for Violin Solo공연>, Goldsmith’s College, London SE 14, University of London, 런던(7월 6일).
무어맨이 주도하는 뉴욕 아방가르드 음악제 <The 2nd Annual New York Avant-Garde Festival>에 참가, 스톡하우젠의 <오리지날>의 한 파트로 <Robert Opera>, <Robot K-456>를 무어맨과의 협연으로 초연, Judson Hall, New York (8월 30일 – 9월 8일): 져드슨 홀에서 스톡하우젠의 <오리지날>이 공연되는 사이, 극장 밖에서는 Henry Flint, Maciunas, Saito, Ay-o등 일부 과격파 플럭서스 멤버들이 ”인종을 박멸하라“는 구호와 함께 시위를 벌였다. 유럽문명의 허구를 비난하는 이들은 스톡하우젠의 작품이야말로 문화제국주의의 산물이라고 고발한 것이다. 아이러니칼하게도 시위를 벌이는 사이에 그들의 동료 백남준은 안에서 공연을 하고 있었다.
위의 사건은 플럭서스 내부의 갈등을 반영한다. 다양한 배경과 독자적인 개성을 갖는 예술가들의 모임인 까닭에 이즈음이면 이미 마키우나스의 통솔력이 큰 효과를 거두지 못한다. 마키우나스는 마음대로 되지않는 플럭서스 멤버들을 놓고 일종의 챠트를 만들었다. <진정 플럭서스인>, <어쩌다 플럭서스인>, <더 이상 플럭서스가 아닌>, <전혀 플럭서스가 아닌>의 네범주로 나누어 <플럭서스 사람들>을 평가하고, 그외에 블랙리스트를 만들어 그에 속한 Al Hanson과 Moorman을 파문하기도 하였다. (H. Ruhe, <fluxus>1979)
플럭서스 사람들이 그룹활동 이외에 독자적인 예술영역을 갖고있는 점이 불화의 씨가 되기도 한다. 보스텔의 <Decollage>, 벤 보티에의 <Total Art>, 또는 히긴스가 운영하는 <Something Else Press>, 백남준의 <비디오아트>는 서로를 화합시키기보다 갈라놓게 작용하였다. 또한 보이스는 삶과 죽음에 대한 개인적 경험을 상징적으로 표출하는 극도의 개인주의와 표현주의로 마키우나스의 무명성과 집단주의에 위배되어 마키우나스로 부터 전혀 플럭서스가 아닌 범주로 지목받은 것이다.
<Pop Sonata>초연, Philadelphia College of Art, 필라델피아 (11월).
<Monday Night Letter> 씨리즈에서 알리슨 놀스의 <Assorted Night Riders>에 출연, Cafe a Go-Go, 뉴욕 (11월).
Rose Art Museum에서 공연, Brandeis University, 마사츄세트.
1963년의 부퍼탈 개인전 <Exposition of Music>에 관한 후기를 플럭서스 기관지 <V TRE>에 발표: <V TRE>는 브레흐트가 우연히 발견한 타다남은 네온사인의 글자인데 그것이 신문 이름으로 채택된 것이다. <V TRE>는 1963년에 브레흐트에 의해 단독 발행되었다가 1964년 부터 마키우나스와의 공동작업으로 발행되면서 <cc V TRE>로 그 이름이 바뀐다. cc는 마키우나스의 암호이다. Bob Watt는 k로, A. Knowles는 p로, Brecht는 c 등으로 마키우나스에 의해 지정되었으나 아무도 그 연유를 모른다. cc는 이 신문작업이 브레흐트의 <Water Yam> 다음의 두번째 작업이란 뜻이라고 한다.
▶︎ 1965년
백남준의 미국 최초 개인전 <Nam June Paik: Electronic TV, Color TV Experiments, 3 robots, 2 Zen Boxes & 1 Zen Can>, Wollman Hall, New School for Social Research, 뉴욕 (1월 8일 부터): 이 전시회를 동반하여 무어맨이 반 나체로 첼로 연주하는 <Cello Sonata No. 1 for Adults Only> 초연.
백남준은 에로스를 건설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무엇이 건설이고 무엇이 파괴인지는 견해에 따라 다르며, 썩는다는 것이 박테리아 입장에서는 건설일 수도, 생식일 수도 있다고 덧붙인다. (최일남, <신동아> 1984년 8월)
<Variation on a Theme of Saint-Saens>초연에서 무어맨은 물통에 몸을 적셔가며 첼로를 연주하여 관중들을 또 한번 놀라게 하였다. Philadelphia College of Art, 필라델피아 (2월 26일).
무어맨과 유럽 순회공연 떠나다:
<Musica Nova>에 참가, 다수작품 공연, Reykjavik, 아이스랜드.
Jean Jacques Lebel이 주도하는 자유표현의 축제, <Festival de la Libre Expression>에 참가, American Artists Center, 빠리 (5월): 이 공연에서 백남준과 Ben Vautier가 처음 만난다. 벤의 말에 의하면, 백남준은 공연을 앞두고 흥분해 있으면서도 관중들의 반응에는 전혀 개의치 않는것이 인상적이었다하며, 한편 벤은 백남준의 공연에 조명, 음악딩을 도와주었는데 백남준은 다음날 벤의 공연에 나타나지 않았다고 서운해 한다.(Ben, <How We Met> 1976)
<Cello Sonata No. 1 for Adults Only> 공연, Galerie Zwirner, 쾰른.
프랑크프르트 대학 학생관에서 다수 작품 공연.
Technische Hochschule에서 다수 작품 공연, 아헨.
24시간 연속 공연을 하는 <24 Stunden>에 참가하여 무어맨과 <Robot K-456>공연, Galerie Parnass, 부퍼탈 (6월 5일-6일): 이 공연에서 무어맨은 진정제로 먹은 약이 독한 수면제였던 터라 무대에서 잠이들었다. 백남준은 무어맨을 깨우다 못해 자기도 자는 시늉을 했는데, 백남준은 잠들어 버리고 뒤늦게 깨어난 무어맨이 새벽 2시 부터 혼자서 열연을 했다. (백남준, <Beuys Vox>)
Rene Block 화랑이 주최한 <Sixth Soiree>와 <Seventh Soiree> 에 참가, <Robot Opera>공연, Rene Block 화랑, 서 베를린 (6월 14일).
8월에 뉴욕으로 돌아오다.
10월에 새로 발명, 시판된 비디오 시스템을 구입하여 교황 바오로 6세의 뉴욕방문 기념행진을 찍고 그 테이프를 <Elecrtonic Video Recorder>라는 전시 이름으로 상영, Cafe a Go-Go, 뉴욕(10월 4일, 11일): 당일저녁 죤 케이지 작품 <26‘1.1499 for a String Player>를 무어맨과 공연. 이 작품에서 웃통 벗은채 무어맨 앞에 엎드린 백남준은 무어맨이 연주하는 인간첼로가 된다.
케이지의 <Variation No.5>에 참가, <Electronic Television>공연및 전시, 링컨 센타 Philharmonic Hall, 뉴욕.
<First World Congress: Happening>에 참가, Saint Mary’s of the Harbor, 뉴욕 (8월 30일).
<Once Festival>에 참가, Ann Harbor, 미시간 (9월1일).
<The 3rd Annual New York Avant-Garde Festival>에 참가, <Variations on a Theme by Saint-Saens> 공연, Judson Hall, 뉴욕 (8월 25일-9월 11일).
<New Cinema Festival 1>에 참가, <Videorape Essay No.1>, <Zen for Film No.1>, <Zen for Film No.2>, <Electronic Television>(Stan Vanderbeek과 공동작업), <Variation on a Theme of Robert Breer>등 발표, Film Makers Cinematique, 뉴욕 (11월 2일).
개인전 <Electronic Art>을 통해 그의 첫 비디오테이프 리코더 설치작업을 선보임, Bonino 화랑, 뉴욕 (11월-12월): 마리 바우어마이스터가 1965년 뉴욕에 왔을때 백남준을 보니노 화랑 주인 Fernado Bonino에게 소개하는데, 백남준의 천재성을 알아차린 보니노는 백의 작품이 상업성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5차례에 걸쳐 전시회를 열어준다. 보니노와의 첫 전시<전자 예술>을 준비할때, 온통 전선과 전기도구로 가득찬 화랑안에서 화랑주인은 감전될까봐 걱정하는데 백남준은 개막일 까지 화랑에서 웅크리고 자면서 준비에 몰두하였으며, 일이 잘 될때는 한국노래를 흥얼거렸다고 한다. 전시결과가 좋아 하루에 수백명씩 전시장에 몰려들었다고 한다. (Gardner, <Artnews>, 1982년 5월)
상기 전시를 위하여 백남준은 <로보트 K-456>을 재 조립하여 일반에게 선보이고 그것으로 인기를 끈다. 이 로보트는 1982년 영구 처분할때까지 백남준 전시마다 한목 끼게 되는데 자금사정으로 한때는 팔아치울 생각도 하였다. 1964년 아베와 처음 만들 당시 $2400이 들었는데 그것을 $1200에 팔아달라고 케이지에게 부탁하면서 다음과 같이 편지를 띠운다. ”로보트 K456을 내놓는 것은 여간 가슴아픈 일이 아니지만 돈 많은 양부모를 찾아 입적시키고 싶으니 양자를 보살필 줄 아는 새부모를 찾아주기 바랍니다.“ (유준상, <현대미술> 1988 가을)
<Gala Music for the 50th Anniversary of John Cage: Autobiogrphy>라는 논고를 <Happening U.A., Pop Art, Nouveau Realism>란 책에 기고.
논고 <Pensee 1965>를 <24 hours>에 실림.
<Symphony No.5>를 <Happenings, Fluxus, Pop Art, Nouveau Realism>책에 발표.
1월 뉴스쿨에서 있었던 <Elecrtonic TV & Color TV Experiment>전시에 관한 후기 발표.
논고 <Laser Idea No.3>, <Utopian Laser TV Station>을 Something Else Press 통해 출판.
▶︎ 1966년
Takehisa Kosugi의 작품을 Asia House에서 공연, 뉴욕 (2월 14일): 코수지 는 “뉴욕 사람들에게 부끄러워하는 법을 가르치기 위해 일본서 뉴욕에 왔다”고 하는 아방가르드 음악가로 주로 죤 케이지와 함께 공연활동.
<Avant-Garde Music>에 참가, 무어맨과 다수 작품 공연, Philadelphia College of Art, Times auditorium, 필라델피아 (3월 13일).
<The 4th Annual New York Avant-Garde Festival>에 참가, Central Park, 뉴욕.
<Toward a More Sensible Boredom>에 참가, 코수지와 함께 다수 작품 공연,
Filmmakers Cinematique, 뉴욕 (4월 21일).
<Eastern U.S. Physicists Conference>에 참가, Museum of Art, Rhode Island School of Design, 프로비덴스.
<Programmed Art> 그룹전에 참가, Museum of Art, Rholde Island School of
Design, 프로비덴스.
<Continuous Performances of New Music>에 참가, <Johann Sebastian Bussotti>을 Malcolm Goldstein과 협연, Kirkland House Music Society, Havard University,, Cambridge, 마사츄세트.
<Art Turns On> 그룹전에 참가, 보스턴.
비디오테이프 <Dieter Rot on Street> 제작 (흑백).
비디오테이프 <Variations on Johnny Carson vs. Charlotte Moorman> 제작(흑백).
논고 <We Are in Open Circuit>와 <Utopian Laser TV Station>을 Somethingelse Press에 출판.
유럽 순회공연:
제 3회 <Festival de la Libre Expression>에 참가, 빠리(4월 26일).
곤도라를 타고 공연한<Gondola Happening>에서 케이지의 <26’1.1499 for a String Player>공연, Ponte Rialto, 베니스 (6월 18일).
Libreria Feltrinelli에 참가, 로마.
<Variations on a Theme by Saint Saens> 공연, Yalkut와의 공동작업인<Cinema Metaphisique>발표, Galerie Zwirner, 쾰른.
<As Boring As Possible>초연, Erik Satie의 <Vexations>공연, Forum Theatre 와 Galerie Rene Block, 서 베르린 (7월 16-17일).
<Opera Sextronique>초연, <As Boring As Possible>, <Simple>, <Johann
Sebastian Bussotti>등 공연, Technische Rochschule, 아헨.
프랑크프르트의 Studio Galarie와 Goethe Universitat에서, 뒤셀도르프의 Staaliche Kunstakademie에서, 스톡홀름의 Pistol Teatern에서 공연,(9월).
<Art and Technology Symposium of Fylkingen>의 일부로 개최된 <Vision of the Today> 그룹전에 참가하여 <TV Cross>처음 전시, Museum of Technology, 스톡홀름(9월).
<Variations on a Theme by Saint-Saens>, <Cello Sonata No.1 for Adults
Only>, <Etude Platonnique No. 3> 공연, Galerie Parree, Galerie 101. 코펜하겐 (9월 30일).
▶︎ 1967년
유럽 순회공연 마치고 1월에 뉴욕으로 돌아오다.
<Opera Sextronique> 공연, Philadelphia College of Art (1월)
<Opera Sextronique>공연, Filmmakers Cinematique, 뉴욕 (2월 9일): 무어맨의 과도한 노출로 공연도중 뉴욕시 경찰당국에 의해 공연이 저지되고 백남준과 무어맨은 연행된다.
TV 프로그램 <The Mero Griffin TV Show>에 출연하여 무어맨과 <Variations No.2 on a Theme of Saint-Saens>를 협연한다, WNET-TV, 뉴욕.
무어맨과 공연, Black gate Theatre, 뉴욕.
<Concert Fluxus> 그룹전에 참가, Galleria la Bertesca, 제노바 (6월).
<The 5th Annual New York Avant-Garde Festival> 에 참가, <Amelia Earhart in Memorium> <Cheque or Money Order>등 초연, Staten Island Ferry, 뉴욕 (9월 29일- 30일): 이행사를 동반하는 그룹전에 <Electronic Television>, <Video Tape Study> 전시.
<Twelve Evenings of Manipulation>에서 <Cutting My Arm>초연, Judson Gallery, 뉴욕 (10월 5일).
<Festival of Light> 그룹전에 참가, Howard Wise Gallery, 뉴욕.
<Light Orbit> 그룹젼에 참가, Howard Wise Gallery,뉴욕.
<The Artist as Filmmaker> 그룹전에 참가, The Jewish Museum of Art, 뉴욕.
<Light, Motion, Space> 그룹전에 참가, Walker Art Center, Minneapolis.
Yalkut와의 공동작업 <Electronic Moon> 발표, 케이지의 <Variation 3> 공연, Barlett Auditorium, Massachussetts University.
알란 카프로 초청으로 State University of New York의 거주 예술가가 되다. Stony Brook, 롱 아일랜드.
개인전 <백남준>, Stony Brook Art Gallery, State University of New York, College at Stony Brook.
록펠러 재단으로부터 비디오 연구 장학금 수여받다: 이때부터 1978년까지 총 $ 101,800 록펠러 장학금을 받게 되는데, 백남준이 재단에 제출한 계획서는 비디오의 장래는 물론 케이블 TV의 출현까지 예측하고 있다.(Gardner, <Artnews> 1982년 5월)
비디오테이프 <Variation on George Ball on Meet the Press> 제작(흑백).
<전자와 예술과 비빔밥>이라는 수필을 1967년 <신동아> 12월호에 기고: <복합매체>를, 혹은 백남준 자신의 말로는<혼합매체>를 비빔밥에 비교하면서 비빔밥의 본질은 그것이 콩나물도, 숙주나물도, 표고도, 시금치도 아니라는 점에 있다고 역설한다. 혼합매체라는 말을 가장 잘 사용하는 맥루한은 그 사람 자신이 혼합과 혼선과 모순과 타협의 비빔밥이란다.
인공두뇌학의 창시자 Norbert Wiener와 미디어 이론가 Marshall McLuhan 의 공통된 비죤을 파헤친 논고 <Norbert Wiener and Marshall McLuhan>을 런던의 <Institute Contemporary Arts Bulletine>에 발표: 1. 위너와 맥루한은 모두 복합매체 발상에 입각하여 한사람은 수학과 물리학과 생물학의 경계에 존재하는 일종의 복합과학인 인공두뇌학을 개발하고, 다른 한사람은 전자기술로 통합되는 지구촌을 꿈꾸었다. 2. 맥루한의 “매체는 메시지”라는 말은 위너가 말하는 “메시지가 보내진 정보나 메세지가 보내지지 않은 정보나 정보라는 같은 기능을 갖는다” 라는 것과 같은 얘기다. 3. 위너는 동물(인간)과 기계의 상호성을 주제로 삼고, 맥루한은 전자매체를 통한 인간의 확장을 논함으로써 둘다 生理과 電子의 유추를 상정한다. 4. 위너에 있어 비결정성은 엔트로피로 나타나고, 맥루한的 비결정성은 “차가운 매체”가 갖는 low definition이다. 즉, 위너에 따르면, 메시지를 주는 정보가 조직적 체계라면 엔트로피는 혼란의 체계다. 메시지에 의한 정보는 그러니까 엔트로피의 역인 부엔트로피이다. 다시말해 메시지가 그럴싸할수록 그것이 주는 정보는 없는 것이다. 그렇기때문에 순전한 잡음은 최대의 정보를 갖는다. 맥루한에 의하면, 만화는 적은 시각적 정보를 제공하기 때문에 차가운 매체다. 제한된 정보에만 의존하는 전화도 차가운 매체이다. 뜨거운 매체가 참여도가 낮은 반면, 차가운 매체는 참여도가 높다. (맥루한은 라디오와 영화는 뜨거운 매체, 전화와 TV는 차가운 매체로 분류한다.) 복합매체와 비결정성에 의미를 부여하고 소통문제를 새롭게 조명하는 위너와 맥루한은 결국 백남준이 간파하듯, 하나가 안이라면 다른하나는 밖이요, 한사람이 비관주의자라면 다른 한 사람은 낙관주의자일 뿐, 같은 시각을 갖인 전자시대의 知性들인 것이다.
▶︎ 1968년
<Intermedia 68: Mixed Media Opera>에 참가, <Melange 66/67>, <Simple>외 다수작품 공연, Rockland Community College, MOMA, 그밖의 뉴욕시내 여러 장소 (2월 16일-4월 12일).
<Dias USA, 1968-Destruction in Art Symposium>에 참가, <One for Radio>초연, Judson Gallery, 뉴욕 (3월 22일).
<Spring Festival>에 참가, <Action Music> 프로그램에서 다수 작품 공연, Wilson Auditorium, University of Cincinnati, 신시나티.
<The 6th Annual New York Avant-Garde Festival>에 참가.
개인전 <Electronic Art II>, Bonino 화랑, 뉴욕 (4월 17일 부터).
<The Destrution Art Group 1968 Presents>에 참가, Judson Gallery, 뉴욕 (5월 10-18일).
<Mixed Media Opera>에 참가, <Arias No. III and IV from Opera Sextronique>, <Variations on a Theme by Robert Breer>, <Variations No.2 on a Theme by Saint-Saens> 공연, Town Hall, 뉴욕 (6월 10일).
<Opera Sextronique> 공연, Lidelraum, 뒤셀도르프.
백남준 초기작품을 거의 수장하고 있는 Wolfgant Hahn의 Collectiion 전시 <Sammlung Hahn>전이 열림. Wallraf-Richrtz-Museum, 쾰른.
<Cybernetic Serendipity: The Computer and the Arts> 그룹전에 참가,
Institute of Contemporary Arts, London, The Cocoran Gallery of Art,
Washington D.C., Palace of Art and Science, 샌프란시스코.
<The Machine: As Seen at the end of the Mechanical Age> 그룹전에 참가,
The Museum of Modern Art, 뉴욕.
<Art in Edition: New Approaches> 그룹전에 참가, Pratt Center for Contemporary Printmaking and new York University, 뉴욕.
<Expanded Education for the Paperless Society>라는 논고 발표: 이 논고는 1967년 Stony Brook 대학에 거주예술가로 3개월 체류할 동안 학생들에게 강의 했던 내용을 정리한 것이다.
▶︎ 1969년
보스톤 WGBH-TV, The Experimental Workshop의 거주예술가로 선정.
비디오테이프 <Electronic opera No.1> 제작(컬러 5분): WGBH-TV 프로그램 <The Medium is the Medium>을 위해 제작, 그 프로그램이 방영함, 보스톤.
비디오테이프 <Experiment with David Atwood>(컬러), WGBH-TV 스튜디오에서 제작, 보스톤.
미국 최초의 비디오 그룹전 <TV as a Creative Medium> 에 참가, <참여TV> 출품, Howard Wise Gallery, 뉴욕 (5월 17일 부터): 무어맨에 의한 <TV Bra for Living Sculture> 초연; 이전시에 출품하였던 <참여 TV>를 건축 설계사 David Bermant가 $500에 구입하여 뉴욕주 로체스터 교외 Long Ridge 쇼핑몰에 설치하였다. 백남준은 이것으로 비디오 작품을 처음 팔아 보게 되었고, 쇼핑 나온 로체스터 주민들은 처음 비디오아트를 경험하였다. 그앞에서 소근거리고, 노래하고, 박수를 치면 재미있는 영상이 나오는 이 TV는 금방 쇼핑센터의 명물이 되었다. (Gardner,<Artnews> 1982년 5월)
<Electronic Art> 그룹전에 참가, University of California, 로스앤젤레스.
<New Ideas, New Materials> 그룹전에 참가, The Detroit Institute of Art, 디트로이트.
<Electronic Art> 그룹전에 참가, UCLA Gallery, 로스앤젤레스.
<Art by Telephone> 그룹전에 참가, Museum of Contemporary Art, 시카고: <Piano Sonata> 초연, <Variations on a Theme by Saint-Saens> 공연
<The 7th Annual New York Avant-Garde Festival>에서 <Fish Sonata>초연,
Wards Island and Mill Rock Island, 뉴욕 (9월 28일 – 10월 4일): <Fish Sonata>에서 백남준은 마른 멸치 한마리씩을 봉투에 넣고, 봉투 겉면에 ”이 고기를 바다로 보내달라“고 써서 일일이 관객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윤명로, <신동아> 1978년 1월호)
<Action for Rene Block>초연, Rene Block 화랑, 서 베를린.
<Destroying All Notations>을 케이지의 저서 <Notation>에 기고.
<Acceleration of Calender>를 <Electronic Art>란 책에 기고.
<A Propos de Pussy TV>를 <Electronic TV and Color TV Experiment>란 책에 발표.
▶︎ 1970년
보스톤 WGBH-TV의 스튜디오에서 아베의 도움으로 <백-아베 신디사이저>를 개발한다: 백남준은 비디오 신드사이저 개발에 따른 노고를 달마의 고행에 비교하였다. 달마가 9년간을 꼼작않고 좌선하느라 배설물이 다리를 녹여 좌상의 부처가 되고 득도하였듯이, 자신의 신드사이저 발명도 9년간의 “TV 배설물”의 축적이라고 한다; $30,000이 소요된 오리지날 신드사이저 모델은 지금 MIT(Massachusette Institute of Technology)에 소장되어 있다. 후일 MIT는 백남준을 교수로 초청하나, 백남준은 시간이 없다고 이를 거절한다.
비디오테이프 <Video Commune> (컬러)을 4시간 생방송으로 중계하면서 제작, WGBH-TV, 보스톤.
비디오테이프 <Electronic Opera No.2> (컬러 7.5분): WGBH 프로그램 Russell Corner 사회의 <Video Variations> 위해 제작.
최초의 미술관 비디오 그룹전 <Vision and Television>에 참가, Rose Art Museum, Brendeis University, Waltham, 마사추세트: <TV Bra for Living Sculpture> 공연.
그룹전 <Happening & Fluxus>에 참가, Koelnischer Kunstverein, 쾰른 (10월).
논고 <Seven Billion Dollars>, <Generation Collage>, <Video Synthsizer Plus>, <The Most Profound Medium>, <Confession of a Cafe Revolutionary>, Simulation of Human Eyes>, <Bagatelles Americanes>, 각종 출판물을 통해 발표.
▶︎ 1971년
Yalkut와 공동 작업으로 <Hit and Run Screening of Video Films>전시, Rizzoli Screening Room, 뉴욕.
개인전 <Electronic Art III>, Bonino 화랑, 뉴욕 (11월 23일 부터): <Concerto for TV Cello and Videotapes> 초연, <Paik-Abe Video
Synthesizer> 초연, <TV glasses>초연.
<Video Film Concert>에 Jud Yalkut와 공동 제작한 필름발표, Millennium Film Workshop, 뉴욕.
<Cineprobe>전시에 Yalkut와 공동작업한 필름발표, The Museum of Modern Art, 뉴욕.
<Sonsbeek71: Sonsbeek Buiten de Perken> 그룹전에 참가, Arnheim, 홀랜드.
<The 8th Annual New York Avant-Garde Festival>에 참가, 69th Infantry Regiment Armory, 뉴욕.
제3회 <Festival Gruppe 70>에 참가, Galleria Numera, 플로렌스.
<St. Jude Video International> 그룹전에 참가, De Saisset Art Gallery and Museum, University of Santa Clara, 캘리포니아.
New American Filmmakers Series의 제 1회 행사인 <Video Show>에 참가, Whitney Museum of American Art, 뉴욕.
WNET-TV Channel 13의 TV Lab (David Loxton 주도) 거주예술가로 선정되다. 뉴욕.
비디오테이프 <Paik-Abe Synthesizer with Charlotte Moorman>제작(컬러30분), WNET-TV Workshop, 뉴욕.
보스톤의 WGBH-TV 방송을 위해 비디오테이프를 제작: 여기서 보스톤 심포니와 협연하는데, 교향악단이 연주하는 베토벤 피아노 협주곡 4번에 맞추어 화면에는 베토벤의 석고상을 큰 주먹으로 계속 때리고 장난감 피아노를 불태우는 장면이 방영된다.
논고 <WCIA Calling>, <TV Tortured the Intellectuals for Lomgtime>, <Video Commune>, <Postmusic> 발표.
▶︎ 1972년
<Musica Nova>에 참가, 브레멘.
<Experimental Television Center, Binghamton, New York>에 참가, <Concerto for TV and Videotapes>, <TV Bra for Living Sculpture> 공연, Everson Museum of Art, 시라큐스.
<Live Video>에서, <TV Penis>와 <TV Bed>초연, The Kitchen Mercer Art Center, 뉴욕 (6월 29일).
<Soho Festival>에 참가, 무어맨과 <Peace Cantata>공연, 뉴욕.
<The 9th Annual New York Avant-Garde Festival>에 참가, <TV Bed>등 공연, New York Harbor aboard the Alexander Hamilton (the <Riverboat> show), South Street Seaport Museum, 뉴욕.
<The Twelfth Annual October St. Jude International: Videotapes> 그룹전에 참가, Everson Museumm of Art, Syracuse, 뉴욕.
Yalkut와 공동주최로 <Video Film Concert>를 개최, <Videorape Study No. 3>, <Cinema Metaphisique Nos. 1-5>, <Electronic Moon No. 2>등 발표, Millennium Workshop, 뉴욕.
<Electronic Fables>, <Electronic Moon N0. 2>, <Beatles Eletronic>발표, The Kitchen, 뉴욕.
<TV Bra for Living Sculpture>, <Cinema Metaphisique>, <New Piece for Charlotte>등 발표, Andrew Dickinson White Museum, Cornell University.
비디오테이프<The Selling of New York>제작 (컬러 7.5분), WNET-TV, 뉴욕: 1975년에 이 테이프는 <Suite 212>라는 테이프에 병합된다.
비디오테이프<Waiting for Commercials> 제작 (컬러), WNET-TV, New York.
논고 <Binghamton Letter>, <Deux Lettre a Hans Otte>, <My Symphonies>, <Communication Art>, <Nam June Paik – Charlotte Moorman>등 발표:
<Binghamton Letter> 가운데, ”기생은 남성 쇼비니즘을 유지시키는 가장 오래된 여가장치이다. 결혼은 섹스 접근을 위한 순간적 시스템이다. 전화는 점대 점의 소통 시스템이다. 라디오와 TV는 물고기 알같이 점대 공간의 소통이다. 비디오 소통 혁명의 최종 목적은 공간대 공간, 혹은 평원대 평원의 거침없는, 혼선없는 상호 소통이다.“
<Communication Art>는 시라큐스 에버슨 미술관에서 열린 다글라스 데이비스의 전시 카타로그를 위해 썼다. 이글에서 백남준은 보드레르의 correspondence 개념은 예술과 소통에 관한 연구나 다름없다면서, <악의 꽂>에서 ”nature”를 “video sphere”란 단어로 바꾸기만하면 그 시는 현대 사회의 안테가 구실을 하는 예술가들의 지침서가 될 것이라고 역설한다.
▶︎ 1973년
Yosi Wada Band와 무어맨과 함께 다수 작품 공연, The Kitchen, Mercer Arts Center, 뉴욕.
<Concerto for Piano snd Cello>에서 <From Electronic Music to Electronic Opera>등 공연, Smith Music Hall, Univeristy of Illinois, Campaign-Urbana.
<Fluxus Sonata I>, <Fluxus Games>등 초연. 80 Wooster Street, 뉴욕.
<The Television Show>에 참가, WNET-TV, 뉴욕 (5월).
<TV Bra for Living Sculture> 공연, Wesleyan University, Middletown, Connecticut (9월 15일).
<The 10th Annual New York Avant-Garde Festival>에서 무어맨 공연의 <Train Cello>초연, <Concerto for TV Cello and Videotapes>, <TV bra for Living Sculpture> 공연, Grand Central Station, 뉴욕 (12월 9일).
<Circuit A Video International> 그룹전에 참가, Everson Museum of Art, 시라큐스.
<New York Collection for Stockholm> 그룹전에 참가, Moderna Museet, 스톡홀름.
<Cremer Collection-European Avant-Garde, 1950-1970> 그룹전에 참가, Kunsthalle, 튜빙겐.
개인전 <Electronic Video (Intermedia Presents a New Experiment by Nam June Paik>, The Kitchen, 뉴욕.
개인전 <Videotapes: from the Perpetual Pioneer of Video Art>, The Kitchen, 뉴욕.
비디오테이프<A Tribute to John Cage> 제작 (컬러 60분, 1976년에 30분으로 개작됨), WGBH-TV, Boston: 1974년 방송.
비디오테이프 <Global Groove> 제작 (컬러 30분), John Godfrey의 기술협조 얻음, WNET-TV, 뉴욕: 1974년 1월 WNET에서 방송됨.
논고 <TV Chair>, <Global Groove and Video Common Market>발표.
이해, 스톡홀름의 Moderna Museet가 <TV Chair>를 구입한다. 뉴욕 메이시 백화점에서 산 크롬의자에 수상기를 부착해 비디오를 틀면 그레타 가르보와 마리린 몬로를 꼴라쥬한 화면이 나온다. 백남준의 말처럼 의자에 앉아 밑을 내려다 보면 세계 최고의 두 미인을 본다.
유럽은 미국보다 쉽게 백남준 작품을 구입하며, 대부분 독일 화상 르네 블록을 통해서 거래가 이루어진다.퐁피두 센터가 <Video Fish>를 구입하였고, 암스테르담의 Stedelijk 미술관이 뉴욕 메디슨 街 골동상에서 구입한 부처상으로 만든 <TV Buddha>를 $20,000에 구입하였다. (Gardner, <Artnews> 1982년 5월)
▶︎ 1974년
백남준 미국 최초 비디오테이프 회고전 <Nam June Paik: Videa ‘n’ Videology 1958-1973> Everson Museum of Art, 시라큐스: 에버슨 미술관은 1971년부터 비디오부를 설치하고 비디오아트를 후원한 미술관이다. 설치 당시부터 큐레이터로 활약한 David Ross는 비디오의 고참 이론가일 뿐 아니라 현재는 뉴욕 휘트니 미술관의 관장직을 맡고있다.
개인전 <Electronic Art IV> 에 <TV Sea>, <TV Garden> 전시, Bonino 화랑, 뉴욕 (1월 15일 부터).
<Open Circuit: The Future of Television> 그룹전에 참가, The Museum of Modern Art, 뉴욕.
70년대의 국제예술을 조명하는 그룹전 <Projekt 74: Aspekte Internationaler Kunst am Anfang der 70er Jahre>에 참가, <Video Buddha>, <TV Cello>전시, Kunsthalle Koln, Kolnischer, Kunstverein, 쾰른.
<EXPRMNTL 5: International Film Festival> 그룹전에 참가, <Triangle Buddha>전시, Knokke-Heist, 벨기에.
<Art Now ’74: A Celebration of the American Arts> 그룹전에 참가, Johm F. Kennedy Center for the Performing Arts, 워싱톤.
<Program of Videotapes>에 참가, <Fluxus Sonata> 초연, Anthology Film Archive, 뉴욕(11월 17일).
<The 11th Annual: New York Avant-Garde Festival> 참가, Shea Stadium, Flushing, 뉴욕(11월 18일).
<Cinema Metaphysique No. 15>(16mm film, 4분), <Beatles Electronique>(16mm color press, 3 분), <Electronic Moon No. 2>(16mm color film, 2분)등 발표, Anthology Film Archive, 뉴욕 (12월 21일).
<Sans Video: Music for Merce Cunningham>에서 커닝햄 댄스 팀과 함께 공연 Westberth, 뉴욕.
Anthology Fikm Archive에서 공연, 뉴욕.
Galerie L’Attico 에서 공연, 로마.
논고 <Bimghampton Letter to Radical Software>, <Abstract Time>발표.
▶︎ 1975년
<백남준> 개인전에 <Paper TV>, <TV Buddha> 전시, Rene Block 화랑, 뉴욕 (2월).
개인전 <Fish on the Sky – fish hardly flies anymore – let fishes fly again>, Martha Jackson 화랑, 뉴욕.
<Video Art> 그룹전에 참가, <TV Garden> 전시, the Institute of Contemporary Art, University of Pennsylvania, Philadelphia, Chicago Art Institute.
<Arte de Video> 그룹전에 참가, Museo de Arte Contemporaneo, Caracas.
<Illuminous Realities> 그룹전에 참가, Wright State University, Dayton,
오하이오.
<Selections from the Collection of Dorothy and Herbert Vogel> 그룹전에 참가, <The Clock Tower> 전시, 뉴욕.
60년대 음악과 음악적 오브제를 소개하는 <Objekte und Konzerte zur Visuellen Musik der 60er Jahre>에서 <TV Bra for Living Sculture>, <Opera Sextronique>, <Variation on a Theme by Saint-Saens>, <Zen Smiles> 공연, Stadtische Kunsthalle, 뒤셀도르프.
<Voir et Entendre>전시에 참가.
<Piano Show> 공연, Galleria L’Attico, 로마.
베니스 비엔나레 <Stockey Mill Project>에 참가, 베니스.
<The Museum of Drawers> 그룹전에 참가, Kunsthaus, 취리히.
제 13회 상파울로 비엔나레 <Video Art USA>에 참가, Sao Paulo.
<Art Transition> 그룹전에서 <Concerto for TV Cello and Videotapes> 공연, Center for Advanced Visual Studies, Massachusetts, Institute of Technology, Cambridge.
남미 순회전에 <TV Garden and Videotapes>전시.
<Exhibition of Videotapes>에 참가, TheW Whitney Museum of American Art, 뉴욕.
<Benefit for the Once Gallery>에서 <TV Bra for Living Sculpture>, <Concerto for TV Cello and Videotapes> 공연, Martha Jackson Gallery, 뉴욕.
<Fluxus Harpsichord Concert> 공연, Anthology Film Archive, 뉴욕 (5월 5일).
<The 12th Annual New York Avant-Garde Festival>에서 <Violin to be dragged on the Street>공연, Floyd Bennette Field, Brooklyn, 뉴욕 (9월 27일).
비디오테이프 <Suite 212> 제작 (칼러 150분, 1977년에 30분으로 개작됨), 1972년의 <The Selling of New York>을 병합, WNET, 뉴욕.
비디오테이프 <Nam June Paik: Edited for Television> 제작 (컬러와 흑백 29분), WNET, 뉴욕,<Camera3> CBS TV 방송에 출연.
논고 <Marcel Duchamp n’a pas pense a la video> 발표.
▶︎ 1976년
Jean Dupuy가 조직한 <Revolving Stage>전시에 참가, Judson Memorial Church, 뉴욕 (1월 9일).
<Adelaide Festival of the arts>에서 공연, Art Gallery of South Australia, Adelaide가 <Fluxux Tour>를 주도, Soho, 뉴욕 (5월).
John Kaldor의 <4th Project>에서 Bill Viola와 공동 작업.
<The River: Images of the Mississippi> 그룹전에 참가, Walker Art Center, 미네아폴리스.
대용 매체의 작품을 소개하는 <Monumente durch Medien Ersetzen>그룹전에 참가, Kunst und Museumeverein, 부퍼탈.
<Soho Quadrat> 그룹전에서 피아노 연주, Academie der Kunste, West Berlin (9월 5일).
<Dodsringet> 그룹전에 참가, <Electronic Sixtina Chapel>공연, Sven Hansen이 조직, Charlottenborg, 덴마크.
개인전 <Fish flies on Sky>에서 <TV Bra for Living Sculpture> 공연, Galeria Bonino, 뉴욕 (2월).
개인전 <Moon is the oldest TV>, Rene Block 화랑, 뉴욕.
Yalkut와 <Video Film Concert>전 개최, The Kitchen, 뉴욕.
제1회 P.S.1 초청작가로 선정되어 그곳에 기거하며 작업: 이 프로젝트는 휴교중인 Public School 1 을 화가 작업실로 활용하는 것으로, 뉴욕 주정부 재정지원을 받아 The Institute for Art and Uban Resources가 주관, 첫해에 총 78명의 작가를 선정, 초청하였다. 그 가운데, 일년후 백남준과 결혼할 시게꼬 구보다, 개념 미술가 Joseph Kosuth, 공연 예술가 Daniel Buren 과 Denis Oppenheim, Walter de Maria, 비디오 예술가 Vito Acconci 과 Bruce Nauman, 조각가 Richard Tuttle, Carl Andre, Richard Serra등이 뽑힘. 백남준은 이당시 <TV Candle>을 제작, 전시. (6월 9-26일)
비디오테이프<A Tribute to Nam June Paik> 제작을 위한 공연, Rene Block 화랑, Bonino 화랑, WNET-TV 의 공동주최.
비디오테이프 <Guadalcanal Requiem> 제작 위한 공연, King George School, Guadalcanal, 솔로몬 제도.
방송용 비디오테이프 <Nam June Paik>제작, Calvin Tomkins와 Russell Corner 출연, WNET-TV에서 7월에 방송.
<Rembrandt Automatic>(1963), <Video Fish>, <TV Buddha>, <TV Rodin> 전시 및 공연, Stedelijik Museum, 암스테르담.
<Paper TV>전시, Francoise Lambert 화랑, 미라노.
개인전 <Nam June Paik: Werke 1946-1976, Musik-Fluxus-Video>, Kolnischer, Kunstverein, 쾰른 (76년 12월-77년 1월).
▶︎ 1977년
<From Jail to Jungle>에서 <Opera Sextronique>, <Guadalcanal Requien> 공연, Carnegie Hall, 뉴욕 (2월 10일).
Anthology Film Archives 그룹공연에 참가 (5월).
죠셉 보이스의 <Infiltration-Hommage fur Cello>를 공연, Town Hall, 뉴욕.
개인전 <Fluxus Traffic>, Rene Block 화랑, 서 베를린 (2월).
개인전 <백남준>, Galerie Malacoda, 제네바.
<Projects: Nam June Paik>전시, Museum of Modern Art, 뉴욕.
<Document 6> 에서 <TV Garden> 전시, Hessissche Rundfunk, Kassel (6월): Douglas Davis와 Jopseh Beuys와 함께 9분간 위성중계방송공연 (6월 24일).
휘트니 미술관 비엔나레 <1977 Biennal Exhibition>에 참가, Whitney Museum of American Art, 뉴욕.
멕시코 시티 CAYC 총회에 참가하다.
함브르그 미술학교 Hochschule fur Bildende kunste의 초청교수.
일본인 비디오 아티스트 시게꼬 구보다와 결혼하다: 시게꼬는 1963년, 동경 草月홀에서 공연하는 백남준을 보고 한눈에 그가 세계적인 예술가임을 알았다고 한다. 시게꼬는 첫눈에 백남준에게 반했으나 백남준이 작업을 위해 결혼할 수 없다고 버텼기 때문에 독일로 미국으로 그를 따라다니다가 1977년 3월 21일 뉴욕에서 14년의 구애끝에 드디어 결혼식을 올리게 된다. 시게꼬는 일본 니이가따 출생으로 어머니가 음악을 전공한 예술가 집안에서 자라동경 교육대학에서 조각을 전공했으나, 백남준을 만난후 해프닝과 비디오아트에 종사한다. 현재 뉴욕의 근대미술관(MOMA)등 주요 미술관이 그녀의 개인전도 개최하고 작품도 소장하는등 그녀는 국제적인 비디오 아티스트로 활약하고 있다.
백남준은 결혼하는 이해부터 당뇨병으로 고생한다. 자갈을 뜨겁게 달구어 갖고 다니면서 몸을 보해야했다. 그러나 본인은 당뇨병이 생기면서 작품이 좋아졌다고 말한다. 그까닭은 체내의 당분이 뇌세포를 자극하기때문이란다.
비디오테이프 <Guadalcanal Requiem> (컬러 50분, 1979년에 29분으로 개작됨), WNET, 뉴욕.
논고 <Input Time and Output TIme>이 I. Schneider 와 B. Korot이 편집한 <Video Art>선집에 실림.
▶︎ 1978년
뒤셀돌프 국립 미술대학의 교수로 초빙되다.
개인전 <A Tribute to John Cage>, Watari 화랑, 동경.
<TV Garden> 개인전, Musee d’Art Moderne, Centre National d’Art et de Culture George Pompidou, 빠리.
개인전<백남준> 에서 <Concerto for Cello and Videotapes>, <TV Bra for living Sculpture> 공연및 전시, Musee d’Art de la Ville de Paris, 빠리.
마키우나스 추모공연에서 보이스와 함께 <Piano Duet in Memoriam to George Maciunas> 초연, Staatliche Kunstakademie, Dusseldorf (7월 7일): 47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난 마키우나스는 동양의 윤회설을 믿고 그의 친구 Bakaitis에게 자기는 차생에는 개구리로 태어날 것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1978년 2월 마키우나스가 폐암 걸린것이 발견되었을때 백남준은 입윈비를 위한 모금운동을 시작하여 $9000을 모은다. 그중 $2000은 이미 유명해진 보이스가 낸것이었다. 그때 마키우나스는 공짜는 싫다고 보이스에게 그에 상당한 본인의 작품을 보내기를 원해 백남준이 그 작품을 보이스에게 전하게된다. 이때 그 두사람은 모금을 더 하기위해 듀엣 콘서트를 하기로 합의한다. 르네 블록의 주최로 보이스가 1972년에 쫒겨난 듀셀도르프 미술학교에서 공연을 하게되는데, 두사람은 사전에 아무 연습이나 약속없이 74분간 (마키우나스의 47세를 거꾸로 한 숫자)을 연주하는 것이다. (백남준, <Beuys Vox> 1989)
비디오테이프 <Merce by Merce by Paik> (컬러, Part 1: Blue Studio (5부) 30분, Part II:Merce and Marcel 30분), WNET, 뉴욕.
비디오테이프<Media Shuttle: Moscow/New York> 제작 (컬러와 흑백 30분), WNET, 뉴욕.
비디오테이프 <You Can’t Lick Stamps in China> (컬러 30분)를 WNET-TV Lab과 Cable Arts Foundation의 <Visa>시리즈 위해 제작.
WNET-TV Lab과 公的인 관계를 끝내다.
<신동아> 1978년 1월호가 <현대세계의 예술가 129>인을 선정하는 별책 부록을 마련하였는데, 추천인 가운데 한사람이었던 화가 윤명로씨가 백남준을 선정하여 소개하였다.
▶︎ 1979년
<Sammlung Hahn>소장전, Museum Moerner Kunst, 비엔나.
그리스의 키네틱 아티스트 Takis와 함께 <Duet Paik/Takis> 초연, Kolnischer Kunstverein, 쾰른.
▶︎ 1980년
비디오테이프 <Lake Placid ’80> 제작 (컬러 4분): 13회 동계 올림픽 예술제 조직위원회로부터 제작을 의뢰받아, 현지 출장 촬영. 이 테이프로 1981년 휘트니 비엔나레에 참가할 뿐 아니라, 이 테이프가 1982년 <V-yramid>설치 작품의 영상 이미지로 활용된다.
<Intermedia Arts Festival> 에 참가, <One for Violin Solo>, <Variations on a Theme by Saint-Saens>공연, <Video Sonata>를 Emie Gusella와 함께 초연, The Solomon Guggenheim Museum, 뉴욕.
한국 시간예술을 소개하는 <Musik der Zeit I: Begegnung mit Korea> 에서 <Concerto for Cello and Videotapes>, <Variations on a Theme by Saint Saens>공연, <Sinfonie No.6>무어맨 지휘로 초연, WDP-Westdeutsche Rundfunk, Funkhaus, 쾰른: 이 공연에는 한국의 작곡가 강석희 씨도 참가하였다. 강석희씨 작품 <한사람의 타악기 주자와 전자음향을 위한 청동시대>는 어떻게 큰소리를 냈는지 일부 관중들은 도망가고, 대형징을 세게 쳐서 그것이 바닥에 쓰러졌는데, 공연이 끝난 후 백남준은 징이 쓰러질 때가 가장 좋았다고 평했다. (강석희, <공간> 1982, 7)
눈과 귀를 위하여라는 <Fur Augen und Ohren>그룹전에 참가, Akademie der Kunste, 서 베를린.
파르나스 화랑 그룹전<Treffpunkt Parnass 1949-1965> 에 참가, Von der Heyde Museum, 부퍼탈.
쾰른 명물 궁형성당을 위한 프로젝트 <Mein Kolner Dom>에 <The Cathedral as Medium>로 참가, Kolnischer Kunstverein, 쾰른.
비디오 테이프 회고전 <백남준>, The New American Filmmakers Series, Whitney Museum of American Art, 뉴욕.
개인전 <Videa>, Watari 화랑, 동경.
독일 광선학자 Horst Baumann의 도움으로 <Laser Video>전 개최, Stadtische Kunsthalle, 뒤셀도르프: 백남준의 레이저 광선에 대한 관심은 이미 1965년 무렵부터 시작된다. 그 당시 <Laser Idea N0.3>와 <Utopian Laser TV Station>이라는 논고를 통하여 백남준은 고성능 레이저 광선을 이용하여 소수 TV 스태이션의 독점방송을 극복, 다수의 전문방송을 성취할 수 있으리라고 유토피아적 이상을 피력한다. 즉, 모짜르트 단독방송, 케이지 단독방송, 험프리 보가드 방송, 또 그밖에도 underground film 방송까지 확보하리라는 것이다. 백남준의 레이저 광선 작업은 그러나 방송차원보다는 레이저 광선을 이용하여 비디오 이미지를 공중에 띠우는 영상작업으로 발전한다. 레이저 영상은 비디오영상과는 또다른 인식경험을 창출한다. 예를들면 광선으로 비물질화 되어 허공속에서 흐느적거리는 커닝햄의 춤추는 모습은 마치 무중력 속에서 활보하는 우주비행사와도 같이 비사실적으로 보인다. 그러나 관객은 그렇게 기체화된 이미지를 관통하여 들락거릴 수 있음으로써 눈으로 본다기 보다는 몸으로 느끼는 새로운 경험을 인식하게 되는 것이다.
임의 추출방식의 정보라는 <Random Access Information>을 미국 미술 저명잡지 Artforum 9월호에 게재: 이 내용은 백남준이 뉴욕 근대미술관(MOMA)에서 1980년 3월 25일 강연한 내용을 당 미술관 비디오부 큐레이터 Barbara London이 정리하여 발표한 것이다. “21세기 회화는 극도로 복잡하면서도 극히 단순한 프로그램이 가능한 전자 벽지가 될 것이다. 규격화된 전자 캔버스가 등장할 것이다. 브리타니카 백과사전은 정보가 가득차 있어도 지루하다고 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어느 항목이건 어느 페이지건 찾고 싶은 곳을 찾아보면 된다. 그러나 비디오테이프나 TV를 볼때는 만들어진 순서대로 보아야하는 불편함이 있기 때문에, 임의로 찾아 볼 수 있는 random access방법이 개발될때 까지는 책이 존재할 것이다.” 이말은 백남준이 일찌감치 선언한 종이의 죽음을 당분간 보류하는 것이다 (“니체는 신이 죽었다고 말했지만, 나는 종이가 죽었다고 말한다, 화장지만 빼고는.“)
▶︎ 1981년
<Partitur> 그룹전에 참가, Gelbe Musik, 서 베를린.
뉴욕 휘트니 미술관의 1981년 Biennal Exhibition전에 비디오 테이프 <Lake Placid ’80>로 참가.
<Westkunst> 그룹전에 참가, <Robot>, <The Moon is the Oldest TV> 전시, Musee der Stadt Koln, 쾰른.
<Ein Klein Dussel Village Video> 그룹전에 참가, kunstakademie, 뒤셀도르프.
동경 Sony 홀에서 비디오 테이프 개인전을 개최.
개인전 <Random Access/Paper TV>, Watari 화랑, 동경.
<Laser Video>(홀스트 바우만과의 작업)전시에 <Laser Video Space II>, <Video Laser Environment>등 발표, Die Nutzliche Kunste, 서 베를린: 이 전시 후 Neue Berliner Kunstverein 으로 여행.
개인전 <Autobiography in P–>를 동경에서 개최.
비디오와 음악과 무용의 센터인 The Kitchen Center의 창립 10주년 행사 <The 10th Anniversary Concert for the Kitchen>에 참가, 스테이지 디자이너며 백남준의 설치작업을 도와주는 Andy Mannik의 무대에서 무용가 Denise Gordon과 함께 <Life’s Ambition Realized> 초연함으로써 백남준은 매니크에게 이 작품을 헌정하고 매니크는 백남준에게 헌정한 <A Tribute to A. Mannik by Nam June Paik & A tribute to Nam June Paik by Mannik>을 공연헌다. 뉴욕 (10월12일): 필자는 뉴욕체류 당시 이 공연을 통하여 백남준을 처음 만나게 된다. 백남준과 고든의 공연이 끝나고 그공연을 현장 녹화한 비디오 테이프가 뒤로부터 거꾸로 상연하여 비디오 매카니즘이 야기하는 시간의 문제와 보도의 문제를 다시한번 생각하게 하였다. 공연이 끝나고 당시 머스 커닝햄 댄스 컴퍼니 이사장 Barbara Toole의 소개로 백남준과 인사를 나누고, 공연중 백남준이 깨버린 전축판과 바이오린 파편들을 쓸어버리기 전에 주워갖고 나왔다. 뉴욕을 떠나기 직전 백선생을 만난 기회에 당시 주은 <음악조가리들>을 보였더니 사인은 공짜니까 하면서 매 조각마다 유화로 정성들여 사인을 해 주었다.
1981년 가을 <계간미술> 19호에 당시 중앙일보 뉴욕 특파원 김재혁이 백남준과 인터뷰하고 <구미 실험예술의 기수 백남준의 밀실 스튜디오를 가다>라는 제목의 기사를 게제함으로써 처음으로 백남준 탐방기사가 한국에 소개된다.
현대미술 비평가 Battcock에게 바치는 <A Tribute to Gregory Battcock>을 공연, Anthology Film Archive, 뉴욕: Battcock은 백남준에 관한 논고 <From Jail to Jungle: The Work of Charlotte Moorman and Nam June Paik>을 1984년 그 자신이 편집한 <The Art of Performance: A Critical Anthology>에 실는다.
비디오테이프 <My Mix 81>제작.
베르린 미술 아카데미가 제정한 Willi Grohmann Prize 수상.
베르린의 DAAD 장학금 수여받다.
▶︎ 1982년
뉴욕 휘트니 미술관이 백남준의 회고전 <백남준>을 열다. Whitney Museum of American Art (4월 30일-6월 27일): 해프닝에서 비디오로 이어지는 전 작업을 전시한 대규모의 개인전으로 휘트니 미술관은 이 전시를 위해 백남준이 제작한 <V-yramid>를 미술관 소장품으로 구입 상설 전시하고 있다. 전시를 동반하여 5월 9일부터 6월 20일 까지 7차에 걸쳐 주요 비디오테이프 작품이 상영되고, 6월 2일과 3일 양일에 걸쳐 무어맨과의 해프닝이 공연이 있었는데 주로 지나간 작품을 재연하거나 약간 수정하여 보임으로써 과거의 해프닝 작품을 소개하였다. 또한 5월 21일에는 전위 음악가 John Cage, 휘트니 미술관 비디오부 큐레이터 Hanhardt, 쾰를 미술관 관장 Dr. Herzogenrath, 로스안젤레스 현대미술관장 Pontus Hulten, 보스톤 현대미술관장 David Ross(현재 휘트니 미술관 관장)등을 초청, panel discussion을 하기도 하였다.
상기 전시 당시 뉴욕 주재 KBS 특파원 김기덕씨가 전시 현장을 취재하고 백남준씨와 인터뷰를 갖고 그 내용을 한국에 방송하여 한국 최초로 백남준이 방송으로 소개된다. 아쉬웠던 점은 인터뷰 가운데 <달은 가장 오래된 TV>이라는 1965-7년의 작품을 소개하면서 백남준은 서양민족과는 달리 한국인등 우랄알타이계 사람들은 달을 보며 토끼가 떡방아 찧는 장면을 상상하고 많은 설화를 남겼을 뿐 아니라, 그들에게는 달이 가장 큰 볼거리였기때문에 달이 가장 오래된 TV라고 설명하였는데 테이프가 그 중요한 이야기를 담지 못한 채 인터뷰가 끝난 것이다.
휘트니 전시 끝나고 시카고 Musem of Contemporary Art로 여행.
미국 미술잡지 Art News 5월호가 백남준을 표지로 특집기사 게재.(Paul Gardner의 글)
로보트 K-456의 마지막: 1982년 백남준은 20년 가까이 동거동락하였던 로보트-456을 처분하기로 마음먹고, 메디슨가 휘트니 미술관 앞 차길에서 차에 치어 죽게하는 교통사고를 꾸민다. 지나가는 무고한 차가 <살인>을 하게 만든 것이다. CBS 팀이 그 사건현장을 촬영하기로 하였다. 비오는날 자기 아버지의 손에 죽게되는 야릇한 운명을 갖인 이 로보트는 무지 속에서 카메라를 받으며 각본대로 죽어갔다. <21세기 최초의 사고>라고 이름붙은 이 사건을 찍은 비디오테이프는 <Living with the Living Theatre>라는 이름으로 Living Theatre 무용단 창시자 겸 단장 Julian Bech에게 헌정되어, 그 무용단 공연에 상연되었다. 우연의 일치랄까, 필림속에서 로보트가 죽는 순간이 무용단 주인공의 극중 죽음과 일치하였다. (Fargier, <Nam June Paik> 1989). 백남준은 자신의 분신과 같은 그 로보트를 왜 죽였을까? 파괴를 통한 창조인가? 새로운 기술로 비디오 로보트를 만들기 위해 낡은 자동장치 로보트를 희생시킨 것인가?
개인전 <Tri-Color Video> 개인전, Centre George Pompidou. Musee National d’Art Moderne, 빠리.
독일의 비디오 예술을 정리하는 <Videokkunst in Deutschland 1963-1982> 그룹전에 참가, Kolnischer kunstverein, 쾰른.
<60’80 Attitudes/Concepts/Images> 그룹전에 참가, Stedelijkk Museum, 암스테르담.
비디오테이프 <Allan & Allen’s Complaint>, 부인 시게꼬와 공동 제작 (컬러 30분), WNET.
<Korean-American Sensibility> 그룹전에 비디오테이프 <Allan and Allen’s Complaint>로 참가, 뉴욕 한국 문화원: 이 전시는 당시 뉴욕 주재 한국 문화원의 문정관 천호선이 불란서계 미국 큐레이터 Michel Cone을 초빙하여 在美 한국 화가들의 작품을 선정, 전시하고 미국 전지역을 2년간 순회전시한 그룹전이다. 백남준은 이 전시에 출품함으로써 한국과 처음 공식적인 관계를 맺게된다. 당시 초청작가는 김차섭, 김원숙, 박관욱, 이병용, 현힉비, 김소문, 황인기, 박애영, 박혜숙, 변종권, 문미애, 임충섭, 조성희, 김웅, 정연희, 이상남, 홍신자(공연), 최분자.
▶︎ 1983년
휘트니 비엔나레 <From Minimalism to Expressionism>에 비디오테이프<Allan and Allen’s Complaint>로 참가, Whitney Meseum of American Art, 뉴욕.
Carl Solway 갤러리 그룹전에 참가, Cincinnati, 오하이오.
비디오 조각 <Auto Portrait>제작, 전시, 뒤셀도르프 미술학교.
수필 <Du Cheval a Christo>발표.
▶︎ 1984년
우주 오페라 삼부작의 제 1편, <Good Morning, Mr. Orwell>를 뉴욕, 파리, 베를린, 서울을 우주 중계로 연결하면서 공연 (1월 1일): 로리 앤더슨, 죠셉 보이스, 죤 케이지, 머스 커닝햄, 알렌 진스버그, 필립 글래스등 거장들 출연 ; 당시 KBS 이원홍 사장의 적극적인 후원으로 한국이 중계지역으로 참가하게 되고, 2년뒤 우주작업부터는 KBS가 주최기관의 하나가 된다; 중계방송 당시 백남준은 퐁피두 센터에서 총 지휘를 하느라 빠리에 있었는데, 방송이 끝나고 퐁피두 근처 Le Mont Lozere 카페에서 <뒷풀이>할 때 당시 독일 유학중이던 김영동이 대금을 불어 백남준 및 관계자들의 흥을 돋구었다.
<Mostly Video> 개인전, Tokyo Metropolitan Art Museum, 동경.
<Tribute to Marshall McLuham> 개인전, Esperanza 화랑, 몬트리올: 에스페란자는 정기적으로 백남준 전시를 열어 카나다 미술 애호가들에게 백남준을 소개할 뿐 아니라 몬트리올 현대미술관에 백남준 작품을 기증하기도한 백남준 팬이다.
<Content> 그룹전에 참가, Hirshhorn Museum and Sculture Garden, 워싱톤.
이해 6월 23일 백남준은 부인 시게꼬를 동반하고 35년만에 귀국한다. <오웰씨>로 유명해진 터라 잡지 인터뷰도 하고 신문마다 보도되는 등 일약 명사가 되었다. 어렴풋이 괴짜, 기인등으로만 알려졌던 백남준이 세계적인 비디오 아티스트가 되어 錦衣還鄕한 것이다. 숙소로 잡은 워커힐 호텔 방 번호가 귀국 날자의 숫자와 일치하는 2603호였던 것은 우연일까?; 백남준은 원래 1986년에야 귀국할 생각이었다. 왜냐하면 재미교포 한의사며 점성술에도 뛰어난 박동환씨에게 점을 쳤더니 55세 되는 해에 귀향하면 大吉할것이라고 했다는 것이다. (<계간미술> 19호, 1981년 가을, 김재혁). 정찬승씨는 백남준씨가 1960년경에도 서울에 왔었다고 주장하는데 확인되지 않고있다.
1984년 <신동아> 2월호에 황병기씨가 <백남준과 비디오 예술의 미학>이란 논고 발표: “백남준이 자신을 학자로 생각하는 이유는 예술을 과거와 미래를 탐구하는 학문으로 보기때문이다. 그는 에술을 통하여 미지의 세계를 탐구하고 있다고 믿는다. 예술을 통하여 특히 인간의 역사를 공부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역사에는 흥미가 있어도 역사학에는 전혀 흥미가 없는데 역사학은 史記이후의 역사만을 다루기 때문이다.”
<신동아> 8월호에 최일남씨가 백남준과 인터뷰한 기사 <비디오 예술의 황제 백남준씨: “예술도 장사와 마찬가지예요”> 게재: “백남준: 금강산도 식후경이라고 지금 우리나라는 겨우 대들보 세우고 지붕 얹히려고 서둘지만 장차는 그러면 안됩니다. 우리 경제가 성장하려면 하이테크놀로지 경제를 발전해야 하는데 그러자면 제일 중요한 것이 소프트 웨어 입니다. 그리고 하이테크놀로지와 비디오의 관계는 말하자면 사돈관계입니다.”
7월 3일자 <한국일보>에는 백남준과 그의 유치원 친구 수필가 이경희씨와의 대담이 실린다: “백남준: 1966년 까지 일본의 형님이 돈을 보내주어 도움을 받았으나, 그후 돈이 끊어져 한때 고생 많이 했어. 뉴욕에 있을때 Bell Lab이란 세계적 과학연구소에 있었는데, 그때 45센트면 식당에서 피자 한개와 콜라 한병으로 점심을 먹을 수 있는 것을 45센트가 없어서 내 방에 올라가 15센트짜리 라면을 끓여 먹었어. 67년 부터 록펠러 재단에서 돈이 나와 1년에 1만 8천 달라씩 얻어 그걸로 쓰고 있었어.”
6월 26일자 <조선일보>에 <신화를 파는 것이 나의 예술>이라는 제목으로 정중헌씨가 쓴 인터뷰 기사는 백남준이 말한 “예술은 사기”라는 구절때문에 장안의 화제가 된다: “한마디로 전위예술은 신화를 파는 예술이지요. 자유를 위한 자유의 추구이며, 무목적한 실험이기도 합니다. 규칙이 없는 게임이기 때문에 객관적 평가란 힘들지요. 어느 시대건 예술가는 자동차로 달린다면 대중은 버스로 가는 속도입니다. 원래 예술이란 반이 사기입니다. 속이고 속는거지요. 사기중에서도 고등 사기입니다. 대중을 얼떨떨하게 만드는 것이 예술입니다. 엉터리와 진짜는 누구에 의해서도 구별되지요. 내가 30년 가까이 해외에서 각가지 해프닝을 벌였을때, 대중은 미친짓이라고 웃거나, 난해하다는 표정을 지었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그것의 진실을 꿰뚫어 보는 눈이 있었읍니다.”
Berger부부의 현대미술 소장전 <Multiple une Objekte aus der Sammlung Ute und Michal Berger>에 참가, Museum Wiesbaden Kunstsammlungen, 비스바덴 (7월 2일 – 12월 8일).
Rose Art Museum에서 <The Color of Time>라는 제목의 비디오조각 전시, Brandeis University, 마사츄세트 (9월 6일-10월 16일): 당 미술관 큐레이터 Nancy Miller와의 인터뷰에서 백남준은, ”1965년에 나는 꼴라쥬가 오일 페인팅을 대치하듯이 브라운관이 캔버스를 대치할 것이라고 말했다. 지금보면 꼴라쥬는 오일 페인팅을 대치못했어도, 브라운관은 캔버스를 대치할 것이 확실하다. 제3세계는 붓이 값싸고 페인팅이 대중에게 인기가 있으니까 오일 페인팅이 민속미술로는 남겠으나, 서양미술사의 주류는 비디오아트가 될 것에 틀림없다. 앞으로 2인치 두께의 얇은 TV가 나오고 크기가 30/40m까지 되면 우리는 유명한 화가들과 경쟁하눈 입장이 아니라 그들을 뛰어 넘을 것이다. 1915년 에디슨이 축음기를 발명한이래 음악사가 바뀌었듯이 미술도 같은 역사적 단계에 와 있다. 축음기 발명때문에 비틀스가 스톡하우젠보다 더 존경받게 되었다. 이제 비디오 시대에 비틀스타입의 화가가 필요하게 된것이다.“ (당전시 카타로그)
<Video A Retrospective 1974-1984> 그룹전 참가, Long Beach Museum of Art, City of Long Beach (1차;1984 년 9월 9일-11월 4일, 2차; 1984년 11월 25일-1985년 1월 20일): 롱비치 미술관은 1974년부터 비디오부를 설치, 비디오아트 발전에 공헌허고 있다.
제 12회 베니스 비엔나레 <XII Exposizione Internationale la Biennale di Venezia> 에 참가.
<Art and Time> 그룹전에 참가, 브럿셀.
여기로 부터라는< Von Hier Aus> 그룹전에 참가, Messegelande Halle 13, 뒤셀도르프 (9월 29일-12월 2일): 도큐멘타 정도의 큰규모로 벌어진 이 현대미술 국제전을 화가 김창열씨, 비평가 오광수씨, 원 화랑 정기용씨등 한국미술계 인사들이 관람하였고, KBS 문화부 이동식 기자가 취재차 왔다가 백남준씨 소개로 요셉 보이스 화실을 방문하고 인터뷰를 하는 기회를 갖었다; 이 전시에도 참가한 보이스는 독일 국민의 우상으로 그 인기가 대단하여 전시장 안에는 그에게 사인을 받으려는 팬들이 줄을 이었고, 중계차 나온 독일 방송 카메라도 그의 일거수 일투족을 포착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암스텔담의 Stedelijik Museum에서 개최된 비디오그룹전에 참가, <Homage to Stanly Brown>, <Egg Grows>, <Hydra Buddha>, <Autoportrait II>등 전시: <Autoportait II>는 백남준 자신의 마스크가 화면에 피드백되도록 설치한 폐쇄회로 작업인데 조각가 한용진씨가 백남준의 마스크를 주물 제작하였다.
Joseph Beuys와의 2인전 개최, <Swiss Clock-V-Matrix>전시, Seibu Museum 후원, Watari 화랑, 동경.
▶︎ 1985년
개인전 <백남준: 로버트 가족>, Carl Solway 화랑이 쉬카고 아트페어에 소개, Chicago International Art Exposition.
상파울로 비엔나레에 참가, Sao Paulo, 브라질.
평화라는 특정 주제를 내건 <Biennale des Friedens>전시에 참가, Kunsthause und Kunstverein, 함부르그 (85년 12월 1일 – 86년 1월 12일): 르네 블럭이 주최한 이 행사에 많은 플럭서스 거장이 출연했는데, 보이스는 지병인 심장병이 악화되어 참석치 못하고 대신 전화를 통한 이색적인 공연이 이루어졌다. 보이스와 백남준 그리고 덴마크 음악가 Henning Christianson 셋이 피아노 삼중주를 연주할 계획이었으나, 보이스의 피아노앞에는 보이스 대신 산소통이 놓이고 위에는 침상의 보이스와 연결된 전화기가 놓였다. 보이스의 친구 Wolfgang Feelish가 보이스 전화 지시에 따라 산소통의 산소를 쉬쉬 품어대고 칠판에 어려운 철학을 받아썼다. 이것이 보이스의 마지막 공연이었다.
▶︎ 1986년
1월 23일, 65세를 일기로 요셉 보이스가 세상을 뜬다. 그의 일생이 신비에 쌓여 많은 신화를 남기고 인생과 예술이 구별되지 않는 극적인 삶을 살았던 보이스는 백남준의 작업동료이자 백남준과 가장 잘 통하는 <쌍둥이>같은 존재였다. 보이스는 2차 대전중 비행사로 복무하다가 남부 러시아 크리미아 반도에서 적군 폭탄을 맞고 추락하게 된다. 안전벨트를 묶고 있던 옆자리의 조종사는 그자리에서 숨졌으나, 벨트를 묶지 않았던 보이스는 비행기가 지상에 부딪치면서 창을 뚫고 튕겨나와 눈바닥에 떨어져 목숨을 구한것이다. 그지방의 주민들인 몽고계 타타르 사람들이 보이스를 발견하고 온몸에 버터를 바르고 담요로 싸서 썰매로 실어다 간호해준 덕에 보이스는 회생하였다. 그의 작품에 기름덩어리 혹은 왁스, 회색 펠트지, 손전등, 썰매, 약품등이 자주 등장하는 이유는 삶과 죽음의 경계를 몇번씩 들락거린 이러한 개인적 경험에 유래한다. 또한 그러한 기억때문에 동양과 샤마니즘과 백남준에게 각별한 애정을 갖는다 (그는 타타르족이 굿하는 것을 자주 보았다고 한다). 이같은 보이스가 백남준과 한국에서 무당굿을 벌일 계획을 수년 전 부터 하고 있었으나, 그 뜻을 살리지 못하고 타계한 것이다. 백남준은 1990년 7월 서울 현대화랑에서 보이스의 추모굿을 올림으로써 그와의 약속을 이행한다.
체이스 만하탄 소장전 <American Icons: Selections from the Chase Manhattan Collection>에 참가, Bruce Museum, Greenwich, 코네티커트, Heckkscher Museum, 헌팅톤, The Robertson Center for Arts and Sciences, 빙햄톤에 순회전시.
<The Freedom Gallery: The First Decade> 그룹전에 참가, Freedman Gallery, Reading, 펜실바니아.
<Toys as Art> 그룹전에 참가, First Street Forum, St. Louis, 미주리.
시카고 아트페어 <Chicago International Art Exposition>에 참가.
서울, 동경, 뉴욕을 연결하는 우주오페라 제2편 <Bye Bye Kipling>위성공연 (10월 3일): Dick Cavett 사회, Philip Glass, Lou Reed, Kieth Haring, Issey Miyake, Arata Isozaki, Lou Reed, Kieth Haring, Issey Miyake, Arata Isozaki등 출연: KBS등 후원기관의 자금협조에도 불구하고 미국 스텦진의 서울 체제비를 마련하기 위하여 백남준은 자신의 판화를 판매하였다. 그밖에도 이 작업을 위하여 백남준은 상당한 액수의 개인 부채를 지게된다. 백남준은 <키플링>을 계획하면서 마라톤 선두주자의 골인 장면을 일장기 대신 태극기를 가슴에 단 손기정씨가 뛰어들어오는 장면으로 대치하려는 구상을 가지고 있었는데, 마지막 단계에 가서 이 구상을 포기하였다. 이 구상을 포기하지 않았더라면 일본선수의 우승장면이 그다지 두드러져 보이지 않았을 것이다.
10월 11일 <조선일보>에 정중헌이 <키플링>은 예술 내세운 일본 선전쇼라고 비난.
12월 김홍희는 <예술과 비평>지 겨울호를 통하여 백남준의 위성예술은 시각적 환희나 민족적 자긍심을 충족시키려는 입장에서 볼 것이 아니라, 그의 비디오 예술의 핵심인 시간성의 개념과 소통의 문제를 다루는 측면에서 보아야한다고 주장.
개인전 <Nam June Paik: Sculpture, Painting and Laser Photography>, Holly Solomon 화랑, 뉴욕 (9월 24일 – 10월 25일): 미국 아방가르드의 후원자 가운데 하나인 홀리 솔로몬은 앤디 워홀이 초상화를 그릴 정도의 명사이다. 이전시회를 계기로 백남준은 이 화랑의 전속 작가로 계약된다.
개인전 <Nam June Paik: Bye Bye Kipling>, Watari 화랑, 동경.
<Triumphal Arc Double Face>를 퐁피두 센터에 설치.
Franklin Furnace Artie Award, American Film Institute Award, New York State Governor’s Award등 일년에 세번의 수상을 기록하다.
▶︎ 1987년
<ARCO ’87> 그룹전에 참가, 마드리드.
<Documenta 8>에 <Beuys/Boice> 제작, 카쎌.(본문 P. 참조)
<Art LA ’87: Contemporary Korean Art>전에 참가, Jean Art Gallery, 로스앤젤레스.
<Animal Art> 그룹전에 참가, Steirischer Herbst, 그라츠.
<Skultur Projekte/Munster> 조각 그룹전에 참가, 뮌스터.
<L’Epoque, La Mode, La Morale, La Passion> 그룹전에 참가, Centre George Pompidou, 빠리.
<Currents: Eight Contemporary Artists, American’s Korean>전에 참가, 로스앤젤레스한국 문화원.
<Computers and Arts> 그룹전에 참가, Everson Art Museum, 시라큐스.
1987년 휘트니 비엔나레 참가, Whitney Museum of American Art, 뉴욕.
▶︎ 1988년
개인전 <Nam June Paik: Beuys and Bogie>, Dorothy Goldeen 화랑, 로스앤젤레스.
개인전 <Nam June Paik: Color Bar Paintings>, Holly Solomon 화랑, 뉴욕.
개인전 <Nam June Paik: Family of Robot>, South Bank Center, 런던.
<Positions in Art Today>그룹전에 참가, The National Gallery, 베르린.
<Lnteraction: Light, Sound, Motion>그룹전 참가, The Aldrich Museum, Ridgefield, Conneticut.
<American Baroque>그룹전 참가, Holly Solomon 화랑, 뉴욕.
<Private Reserve>그룹전 참가, Dodothy Gallery, Santa Monica, 캘리포니아.
<1988: The World of Art Today> 그룹전에 참가, Milwaukee Art Nuseum, Milwaukee, 위스콘신.
<Video Art: Expanded Forms> 그룹전에 참가, Whitney Museum of American Art at Equitable Center, 뉴욕.
<ARCO ’88> 그룹전에 참가, 마드리드.
서울 현대화랑 개인전 <TV Family> 9월 14일-30일).
<다다익선>제작, 과천 현대미술관 원형공간을 이용하여 영구 설치: 10월 3일 개천절을 뜻하는 1003개의 모니터로 초거대 나선형 탑을 구축. 삼성전자가 수상기를 기증하고, 건축가 김원씨가 구조적 설계를 맡아 제작된 이 탑은 원래 Vladimir Tatlin의 나선형탑 <Monument to the Third International, 1919-20>을 염두에 두고 <타틀린에게 보내는 찬가>라는 이름으로 구상되었던 것이다. 백남준은 그렇게 이름을 부쳐주는 대신 <다다익선>을 타틀린에게 바쳤다; <다다익선>이라는 제목과 관련, 백남준은 이렇게 말한다.“방송이란 것은 물고기 알과 같은 것이다. 물고기 알은 수백만개씩 대량으로 생산되나, 그 가운데 대부분이 낭비되고 수정되는 것은 얼마 안된다. 지난 <굿모닝 미스터 오웰>은 수억의 세계 인구를 상대로 발신한 것이었는데, 이 발신의 내용이 얼마나 受精되었는지는 그야말로 다다익선이다.” (유준상,<현대미술> 1988년 가을)
88년 서울 올림픽을 동반하는 백남준 우주오페라 제3편이자 마지막인 <손에 손잡고, Wrap Around the World>를 공연, 서울 KBS와 뉴욕 WNET의 공동주최로 중국, 소련등 10여개국이 공연에 참가 (9월 10일): 백남준은 서울올림픽에 영상예술로 참가할 것을 구상할때 다음과 같이 적고있다.“세계가 파괴를 향하고 있는 현재 <스타워즈 star wars>가 아닌 <스타피스 star peace>를 만들어 보고싶다. 서울을 비롯해 미주, 유럽, 아시아등 세계각지를 동시중계로 연결하겠다. 테크놀로지는 지금까지 옛문화를 파손시켜왔으나, 최신 테크놀로지인 영상 통신 기술은 각지의 고유문화를 교류시켜 대립이 계속되는 지구를 둘러싸 한데 모을 수 있다. 이러한 발상과 함께 <Wrap Around the World>라는 제목을 정하기 전에, “Olympic Fever”, “Good Morning is the Good Evening”, “Space Rainbow”, “Chip Olympics”등 다양한 제목을 구상.
백남준은 1988년 9월 5일 <서울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앞으로 위성작업을 더 이상 않겠다고 표명하면서, 그러나 앞으로 통일문제와 관련하여 누군가가 남한과 북한, 미국과 소련, 또한 서독과 동독을 연결하는 작업을 하면 좋겠다고 부언하였다.
New York Times는 9월 12일 상기 위성공연을 리뷰하면서, 백남준은 이번에 자기꾀에 자기가 넘어갔다, 리틀엔젤스와 같은 지루한 공연등, 한국 선전이 너무 많았다고 비난.
<손에 손 잡고> 끝나고 이어령씨와의 대담가운데 백남준은 <Wrap Around World>는 5대양 6대주를 보자기로 부드럽게 싼다는 뜻이다. 보자기는 책 한권이나 열권이나 다 쌀 수 있고, 비가 올때는 우산도 되는 무궁무진한 바리에이션을 갖는다. 이와같이 용량에 재한없이 이것저것 융통성 있게 넣을 수 있고 처음부터 틀을 정하지 않고 시작하는 예술도 참 재미있다. 나는 TV의 틀을 깨고싶다고 말하고 있다.(<현대미술>1988 가을)
▶︎ 1989년
개인전 <One Candle>, Porticus, 프랑크푸르트.
개인전 <La fee electronique>에 <Olympe de Gouges>출품, Musee d’Art Moderne de la Ville de Paris.
<Video Skulpture, Retrospetiv and Aktuell 1963-1989>에 참가, Dumont, 쾰른.
불란서 혁명 200주년 기념전 <Les Magiciens de la Terre>에 참가, <Cargo Cult>출품, Musee National d,Art Moderne, Centre d’Art et de Culture Geodge Pompidoo, 빠리.
불란서 혁명 200주년 기념전 <Image du Future 89>에 참가, 로보트 <David 와 Marat> 출품, Cite des Arts et des Nouvelles Technologies des Montreal, 몬트리올 (5월 31일-9월 24일).
<Image World: Art & Media Culture>에 참가, <Fin de Siecle II>, <Magnet TV> 출품, Whitney Museum of American Art, 뉴욕 (1989년 11월 8일-1990년 2월 18일).
개인전 <Nam June Paik 1989: Recent Works>, Esperanza Gallery, 문트리올(1989년 12월 7일-1990년 2월 15일).
▶︎ 1990년
요셉 보이스를 위한 추모공연 올리다, 서울 현대화랑 (7월 20일): 백남준은 한국에서 굿판을 벌이기로 생존의 보이스와 약속했었다. 약속이 이루어지기 전에 보이스가 세상을 뜬 것이다. 백남준은 진오귀굿 기능 보유자인 박수 김석출과 그의 처, 무당 김유선을 초청하여 실제 굿판을 벌이고 그의 혼이 좋은 곳으로 가도록 기원하였으니 어떠한 형태로든 보이스와의 약속은 지킨 셈이다. 한국에서 최초로 선보인 백남준의 해프닝이 전통 무속들과의 협연으로 굿의 형태를 취하였기때문에 한국관객은 생소함 보다는 친숙함으로 해프닝을 대할 수 있었다. 해프닝과 샤마니즘은, 하나는 예술의 형태를 띠고 다른 하나는 제식적으로 치루어질 뿐, 기본원리에서는 크게 다를 바 가 없다. 굿도 볼거리를 제공하는 일종의 공연예술이며, 해프닝이나 굿이나 모두 자기정화라는 치유적 기능을 갖는다. 또한 무당도 아방가르드 못지않게 새로운 비젼을 제시하는 용기있는 사람이다. 더구나 굿이나 해프닝이나 모두 관객의 참여를 기반으로 이루어지는 상호적 매체들이다. 결국 해프닝은 샤마니즘의 현대적 표현으로서, 해프닝의 수행자는, 특히 어려서부터 굿판을 보고 자란 백남준은 첨단의 아방가르드인 동시에 전통 무당이 되는 것이다. 이 굿판이 벌어진 날이 7월 20일 바로 백남준의 생일날이었다. 쌍둥이같은 분신인 보이스의 진혼제를 자신의 생일날에 거행함으로써 백남준은 우연의 신비를 창출하고, 죽음과 탄생의 관계를 규명하는 것이다. “아방가르드는 오래살아서 생전에 쇼부를 봐야한다”고 서슴치 않고 아방가르드 처세론을 펴는 백남준은 보이스의 죽음이 본인의 죽음만큼 안타깝고 서글펏겠으나, 진혼제를 통하여 보이스가 자신의 몸에서 부활하기를 간구하였을 것이다.
▶︎ 1991-2년
유럽 순회 개인전 <Nam June Paik: Video Time-Video Space>에 초기 작품들과 함께 1989-91년 사이에 제작한 로보트 군상 13점 <My Faust, 13 channels>를 선보이다. Kunsthalle Basel (1991년 8월 15일-10월 27일), Kunsthaus Zurich (8월 16일-10월 6일), Stadtische Kunsthalle Dusseldorf (1991년 11월 30일-1992년 1월 12일), Museum Moderner Kunst Stiftung Ludwig Museum des 20. Jahrhunderts Wien (1992년 2월27일-4월 12일).
▶︎ 1992년
개인전 <New Video Sculpture>를 연다. – Hans Mayer화랑, 뒤셀도르프
개인전 <Nam June Paik: Retrospective> – Museum des 20, 오스트리아.
스페인 마드리드 ARCO 92 와 시카고 국제 아트 페어 CIAE 92에 참여한다.
그룹전<Flux Attitude>전에 출품한다 – New Museum, 뉴욕
92년 9월 서울 과천 현대 미술관에서 고국에서는 처음으로 대회고전을 연다. 초기 음악적 오브제에서 비디오테이프, 비디오 조각, 대형 비디오 설치에 이르는 다양한 작품들을 선보이며 전시제목을 <비디오 때. 비디오 땅>이라 이름 부쳤다. 현대화랑, 원 화랑, 미건 화랑에서도 개인전을 갖고, 연이은 TV 인터뷰와 지상보도로 ‘백남준 신드롬’을 일으킬 정도로 막대한 문화적 쇼크를 일으킨다. 고국 회고전을 동반하는 심포지움 <Art 20/21, The Turn of the Century>를 연 3일에 걸쳐 개최한다. 뉴욕 휘트니 미술관 관장 데이빗 로스, 브레멘 현대미술관장 불프 헤르조겐라드 등 세계각국의 유명 미술관장과 아킬레 보니토-올리바, 페에르 레스타니, 킴 레빈, 바바라 런던, 장 폴 파르지에, 에디트 데커와 같은 등 국제적인 평론가들이 초대되었고, 한국에서는 정영목, 이용우, 유홍준, 윤범모, 서성록, 송미숙, 김홍남, 김홍희가 발표자로 참여하였다. 서울 동숭동 문예회관에서는 MBC주최로 백남준의 행위음악적 퍼포먼스가 한국에서는 처음으로 선보였다. 무용가 김현자와 협연.
▶︎ 1993년
93 베니스 비엔날레에 독일관 작가로 참여, 독일의 한스 하케와 공동 수상한다. 한국인으로는 처음 베니스 대상의 영예를 안은 것이다. 수상작품은 <Artist as Nomad>.
백남준은 한편 한국에 93 휘트니 비엔날레를 유치한다. 휘트니 미술관 관장 데이빗 로스에게 진 신세를 갚는다는 동기에서 들여온 이 전시회는 동성애, 에이즈와 같은 성과 신체의 문제를 다룬 과격한 내용의 전시회라는 점에서 한국 상륙에 적지 않은 논쟁과 파문을 일으켰다. 백남준은 이에 일자 한국일보에 라는 “강한 이빨론”을 게재, 지식층의 폭넓은 동조를 얻었다.
개인전 <Feedback and Feedforth>을 연다 – 와타리 현대미술관, 동경
그룹전으로는 대전 엑스포 재생 조형관에 출품을 비롯, 시카코의 국제 아트 페어, 스페인 아르코 등에 참여한다.
8월 제일기획과 미국 Discovery Channel은 백남준에 관한 다큐멘타리 <백남준, 비디오아티스트>을 제작한다. 이 테이프는 미국 전역 및 유럽의 TV와 CATV를 통해 방영할 계획으로 9월중 Discovery Channel에서 우선 방영된다.
한국의 일부 화랑 공동 마련한 12월 ‘작은그림’ 기획전에 백남준도 참여, 현대화랑, 박영덕 화랑, 갤러리 미건에 출품한다.
▶︎ 1994년
일본 후쿠오카 미술관과 소게츠 미술관에서 개인전을 연다.
<The Electronic Superhighway: Nam June Paik in the Nineties>전시회 개최 – Lauderdale 미술관, 플로리다
그룹전으로는 휘트니 미술관에서의 <The Howard Wise Gallery: TV as a Creative Medium, 1969>에 참여한다.
4월 독일 루드비히 뮤지엄에 대형 비디오 작품을 설치하고, 5월에 개관하는 독일 폴크스바겐 뮤지엄에 <백남준 미디어 아트룸>을 설치한다.
7월 남원에 세워지는 영화박물관에 대형 비디오 작품을 설치한다.
9월 25일 CIMAM회의 부대행사로 <백남준 비디오 오페라 플러스 텐>을 퍼포먼스.
11월 7일부터 파리 퐁피두센터에서 열리는 <한계를 넘어서>라는 그룹전에 참가한다.
12월 파리 아메리칸 센터에서 열리는 대규모 현대미술전 <Turning Up>에 출품한다.
12월 한국종합전시장과 갤러리 시우터에서 <94백남준 展> 개최.
베니스 비엔날레에 한국관 건립이 확정되다. 문화체육부의 활약과 함께 백남준의 힘이 크게 작용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백남준은 “한국미술의 역사를 50년이상 앞당긴 쾌거”라고 언급하며 기뻐한다.
▶︎ 1995년
뉴욕 홀리 솔로몬 화랑에서 개인전을 연다.
개인전 <The Electronic Superhighway: Nam June Paik in the Nineties> – Indianapolis미술관, Columbus미술관, Philadelphia Academy of the Fine Art (동전시회 1996년 San Jose 미술관, 산디에고 현대미술관에서, 1967년에 캔사스 Nelson-Atkins 미술관에서 전시 예정)
서울 현대화랑, 박영덕 화랑, 조선일보사 미술관에서 <예술과 통신>이라는 비디오 조각전을 개최한다.
9월 ‘95 광주 비엔날레’에 특별전 <InfoART>전을 기획한다. 구미쪽 담당 디렉터에 미국의 신시아 굿맨을, 한국을 비롯한 아시아 담당 큐레이터 김홍희을 지명하고 100만불짜리 초특급 하이테크놀로지 아트전을 벌인다. 인포아트를 동반하는 <InfoART Talk Show>도 개최한다. 인포아트 참여작가와 세계적인 비디오 전문 비평가들 22인이 예술과 비평, 예술과 정보라는 두 주제를 놓고 자유토론. 참여자는 아킬레 보니토- 올리바, 바바라 런던, 카추에 토미야마, 스콧 페셔, 신시아 굿맨 등과 한국 비평가, 유홍준, 유재길, 송미숙, 홍석기, 김수미, 김홍희. 광주 비엔날레 특별행사로 광주 문예회관에서 퍼포먼스를 선보이다. 황병기, 란스베르기스 대통령, 스타이나 바술카가 우정 출연.
3월 27일 <조선일보>와의 대담에서 “4월 뉴욕 홀리 솔로몬 화랑에서 개인전, 6월 <아시아나>라는 이름의 특별전 참가, 7월 4일에는 제네바에서 UN창립 50주년기념행사의 대표 작가로 참여”할 것이로 바쁜 스케쥴을 공개.
4월 서울 삼성동 종합무역전시장에서 열리는 국제식품전에 2점 출품한데 이어, 5월 부산 무역전시관에서 열리는 부산국제주류음료박람회에도 출품.
MBC가 제작한 로케 프로그램 <베니스비에날레를 가다>에 독일관 대표로 참가해 대상을 수상한 백남준 인터뷰
7월 일본 후쿠오카 아시아 문화상 수상자로 백남준이 선정되어 9월 28일 수상.
KBS는 8월 14일 <세계속의 한국인> 1부에서 ‘예술계’편에 백남준 등 10인 소개
8월 ‘95화랑미술제에 대형작품 <덕수궁의 꿈> 출품.
9월 프랑스 리베라시옹紙은 한국 특집으로 이우환과 백남준을 소개.
뉴욕 소재 Pratt 미술학교 연사로 초청받는다. 이 학교는 학장 취임때마다 강연회를 여는데 백남준이 강연한 10월 16일 예술가와 학생 1,000여명이 몰려들었다.
▶︎ 1996년
1월 독일의 <캐피탈>지가 선정한 미술가 가운데 백남준은 7위를 차지한다.
1월 독일 볼프부르크미술관에서 개인전, 〈High Tech Aller〉 개최.
백남준의 호암상 수상(1995년) 기념으로 그의 예술세계를 조명하는 국제학술회가 3월 25일 호암아트홀에서 열린다. 그 당시 휘트니 미술관 비디오부 큐레이터였던 (1997년 이후 구겐하임 미술관 비디오부 큐레이터) 존 한하르트, 프랑스의 장-폴 파르지에, 독일의 에디트 데커 필립스, 일본의 이토 준지가 스피커로, 한국에서는 강태희, 김홍희가 토론자로 참석한다. 이 행사를 위해 2월에 내한한 백남준, 필자와의 면담에서 다음과 같이 시니컬한 말을 남긴다: “나는 아직도 미국에서는 2.5류이다. 1류는 재스퍼 존스와 라우센버그, 2류는 신디 셔만, 3류는 키엔홀츠라면 나는 셔만과 케엔홀츠 사이인 셈이다. 독일에서는 좀 알아주는 편이지만.”
호암 학술대회 후 뉴욕으로 돌아간 백남준, 4월 8일 갑자기 뇌졸증으로 쓰러진다. Beth Israel Hospital Center에 입원, 서양식 치료를 받으면서도 침을 맞고 한방약을 복용한다. 5개월 병동생활 후 8월 퇴원, 휠체어에 의지하면서도 물리치료 등 투병에 전념한다.
스위스 스워치사가 〈아트 스페셜 시리즈〉11번째 시계로 백남준의 ‘재핑 Zapping’을 내놓았다. 3만점 한정 제작으로 인터넷 판매. 그의 중심 주제가 시간인 만큼 이 재핑은 단순 상품이라기 보다는 그의 작업의 연장으로서 흐르는 시간 속의 음악과 미술의 초시간성을 반영한다.
5월 9일부터 열리는 ‘시카고 아트페어’에 박영덕 화랑은 백남준외 3인 작가 작품으로 참가한다.
<월간마술> 설문조사 결과 백남준이 한국 미술계에서 가장 큰 영향력을 가진 작가로 선정된다.
제1회 월간미술대상 큐레이터부문 대상에 백남준, 신시아 굿맨, 김홍희 공동수상한다. 7월 8일 시상식에 참석못한 백남준, 뉴욕으로부터 수상 메시지를 보낸다.
11월 독일의 시사주간지 Focus지가 (10월 21일자) 선정한 세계의 유명예술가 순 위 12위에 오르다.
▶︎ 1997년
십년에 한번 열리는 조각축제 ‘뮨스터 프로젝트’가 뮨스터시 Westfalisches Landesmuseum에서 열렸다. 백남준은 Schlob 광장에 음향장치가 장착된 32대의 자동차를 설치한 <32 Cars for the 20th Century: Play Mozart’s Requiem Quietly>를 출품, 주목을 끌었다. 부제는 <모차르트의 미사곡을 연주하라. 황혼녁에서 밤 11시30분 사람들이 불평할때까지 연주하라>. 그는 20세기의 3가지 특성이 “조직폭력, 미디어, 자동차 숭배”로서 모두 소비주의를 공통 인자로 내포하고 있다고 말한다.
8월 <월간미술>이 실시한 좋아하는 작가 부분에서 백남준 5위.
8월말 뉴욕 머서가 스튜디오를 열고 자신의 레이저 조각을 공개한다. <빅뱅이후 1억년간 비가 나리다>라는 신작은 바로크적으로 현란한 기존의 레이저 작품과는 다르게 삼각형, 원형, 사각형 등 기하학적 구조물에 레이저 빔을 담은 미니멀적 작품이다.
9월18일 뉴욕의 괴테인스티튜트에서 괴테상 수상.
▶︎ 1998년
<캐피탈>지가 선정한 <세계의 작가 1백인>에서 8위.
<중앙일보>1월 13일자에 뇌졸중 으로 쓰러진 이후의 생활과 새로운 작품구상을 피력한다.
2월 박영덕 화랑이 백남준 작품으로 마이애미 아트페어에 참가, 3월에는 박영덕 화랑에서 근작 30여점으로 개인전을 갖는다. 발병후 첫 개인전이라 주목을 받는다.
구겐하임 미술관이 밀레니엄 프로젝트 일환으로 2000년 1월에 백남준의 개인전을 개최할 것을 결정한다. 구겐하임 관장 토마스 크렌스가 4월 8일자 서한으로 이 사실을 백남준에게 통보. 같은 날 뉴욕타임즈지도 “A Night to Remember for a Thousand Years”라는 제하로 밀레니엄 사업 특집기사를 실으면서 구겐하임의 백남준 전시계획을 소개한다. 같은 시기에 전시될 MOMA의 마티스전 사진과 함께 백남준의 작품 사진을 나란히 게재.
<조선일보> 역시 4월 28일 백남준과의 인터뷰를 통해 2000년 구겐하임 전시회 구상을 소개한다. 그는 신작 레이저 조각을 주로 선보일 예정이라고.
6월 교토상 수상자로 내정, 11월 수상과 함께 약 5억원의 상금을 받게 된다.
7월 수원 경기도 문화예술회관에서 백남준 비디오아트전. 70년대부터 올해의 작품까지 다양하게 선보인다.
9월 경주세계문화엑스포 <미소의 저편>에 참가한다.
9월 경주세계문화 엑스포 미술전시 <새천년의 미소>에 백남준은 멀티모니터 작품 <백팔번뇌>로 참가하였다. 전시는 11월까지.
▶︎ 1999년
1월 <중앙일보>, <동아일보>, <문화일부>등 구겐하임 미술관에서 열릴 백남준의 2000년 전시를 특필한다. <Post Video Art>라는 제목을 부칠 것으로 예정.
1월 ‘마이아미 아트페어’가 수여하는 ‘탁월한 작가상’을 수상한다.
5월 미국의 미술잡지 <아트뉴스>가 20세기의 가장 영향력있는 25인의 작가 가운데 일인으로 백남준을 선정하였다.
6월 독일 쾰른 루드비히 미술관은 20세기 대표적 미술가 120명을 선정한 밀레니엄 전시회 <글로벌 2000>에 백남준을 초대한다.
7월1일부터 양평 바탕골 예술관이 백남준 상설전을 유치, 대형 비디오 조각 거북선 및, 라이트 형제, 존 케이지, 샤롯 무어맨 등 비디오 로봇, 그리고 골동 자동차를 전자적으로 변형시킨 일렉트로닉 수퍼하이웨이를 전시 중이다. 바탕골 전시관은 갤러리 현대와 계약을 맺고 앞으로 2년간 백남준 기념관으로 운용될 예정이다.
8월 이화여대 석좌교수로 위촉되어 가을 학기부터 출강 대신 뉴욕에서 인터넷 강의를 한다.
9월 경기고 개교100주년 기념 판화집을 제작한다. 2000년 2월로 예정된 구겐하임 개인전 경비의 일부를 충당하기 위한 것. 갤러리 현대가 발행하고 백남준의 모교인 경기고 100주년기념사업회가 후원하는 이 판화집의 판매 수익금 일부는 백남준 전시에 쓰이고 일부는 내년도로 예정된 경기고 100주년 기념 미술인 전시회 개최에 활용된다. 백남준의 후배이자 막연한 지인인 천호선의 제안과 책임감수로 실현된 이 판화집은 백남준의 조수 일리길리가 컴퓨터그래픽을 맡고 ICRD 공방이 제작하였으며, 11매를 한질로 125에디션이 발행되었다. 내용은 경기 화동 건물, 뱃지, 교기, 역대 교장의 모습, 경기 6.3 데모 장면 등으로서, 백남준은 이 사진들을 기초로 디지털 판화를 만든 후 그위에 석판으로 드로잉을 첨부하였다.
▶︎ 2000년
1월1일 새로운 밀레니엄 벽두에 <DMZ2000: 호랑이는 살아있다>라는 위성 생방송 프로그램을 방영한다. 1984년의 <굿모닝 미스터 오웰>, 86년 <바이 바이 키플링>, 88년 <손에 손잡고>로 구성되는 위성삼부작 이후 처음 시도하는 위성작업이다. 뉴욕스튜디오와 임진각 행사장을 연결하며 진행된 이 프로그램에서 병중이지만 아직도 건재함을 과시하려는 듯 힘차게 <금강에 살으리랏다>를 노래한다.
2월부터 4월까지 뉴욕 구겐하임 미술관에서 개인전 <The World of Nam June Paik>을 개최한다 (2. 11- 4. 26). 구겐하임이 21세기를 맞으며 첫 기획 전시로 백남준을 초대한 것은 비디오아트와 백남준을 동시에 인정한 의미있는 미술사적 사건이며, 투병중인 백남준에게는 삶의 의미와 희망을 안겨준 생명같은 전시회였다. 구겐하임 시니어 큐레이터이자 백남준 전문가인 존 핸하트의 큐레이팅으로 이루어진 이 전시회는 <TV정원>, <TV 시계>등 고전작품과 함께 후기비디오라고 할 수 있는 레이저 작품들을 선보였다. 레이저 조각 <3원소>는 삼각, 사각, 원형의 기하학적 구조물에 레이저 광선을 담은 작품으로, 원래 이름 <빅뱅이후 이억년간 비가 내리다>가 암시하듯이, 레이저 광선을 우주적 진화의 상징으로 표현한 작품이다. 8미터의 레이저 사다리 구조물인 <야곱의 사다리>는 작가의 21세기 비전과 불굴의 예술의지를 상징하는 작품이다.
이 전시회는 같은해 7월 서울 삼성미술관 순회전으로 이어졌다. 로뎅갤러리와 호암갤러리 두 공간에서 <백남준의 세계>전 (7. 21-10.29)으로 개최된 이 전시회는 1992년 국립현대미술관의 회고전 <비디오때 비디오땅> 이래 한국에서 가장 큰 주목을 받은 개인전이었다.
10월20일 문화의 날 기념식에서 한국정부가 수여하는 금관문화훈장을 수여받다.
▶︎ 2001년
스페인 빌바오 구겐하임미술관에서 <The World of Nam June Paik> 순회전
▶︎ 2002년
뉴욕 록펠러 센터에서 멀티미디어 송신탑 <트렌스미션>을 발표한다. 이 작품은 2004년 시드니 페스티벌에서 전시한 후, 작가에 의해 2008년에 개관할 미래의 백남준미술관에 기증하게 된다.
한국민속촌의 미술관 개관 기념으로 <백남준 특별전>(5.4-7.7)이 열리다. 이 전시회는 동 미술관의 콜렉션으로만 구성되었는데, 특히 작가가 민속촌미술관을 위해 제작한 멀티모니터 설치작품 <세기말, 새천년>이 주목을 끌었다.
▶︎ 2004년
1월 시드니 페스티벌에 참가, <트랜스미션>을 오페라하우스 야외무대에 설치하다(1.8- 1.26).
베를린 구겐하임 분관에서 <Global Groove 2004>을 발표한다. (4.17-7.9). 이 작품은 1974년에 발표된 백남준의 대표적 싱글채널 비디오테이프 작품 <글로벌 글로브>를 30년 만에 개작한 작품이다.
10월 소호 그랜 스트릿 스튜디오에서 프레스 퍼포먼스 열다. 백남준 뉴욕스튜디오 분당 분관을 홍보하기 위해 조카 켄 하쿠다에 의해 기획된 이 프레스 컨퍼런스에 한국과 미국의 취재진 40여명이 초대되었다. 피아노에 칼라풀한 물감으로 채색하고 넘어트리는 이 피아노 퍼포먼스는 2000년 구겐하임 개인전 이후 4년만에 처음 행한 퍼포먼스이자 생애 마지막 퍼포먼스였다.
▶︎ 2006년
1월 29일(한국시간 1월30일) 마이애미 자택에서 별세하다.
2월 3일 오후3시 뉴욕의 프랭크 캠벨 장례식장에서 시신 뷰잉과 함께 영결식 거행되었다. 이 캠벨 장례식장은 재클린 케네디, 존 레논과 같은 명사들의 장례식도 치룬 유서깊은 명소로 이날 수백명의 문상객이 쇄도하였다. 아방가르드 무용가 머스 커닝햄, 유명 미디어 비평가 러셀 코너, <성의 정치학>의 저자 케이트 밀레트, 전 휘트니 미술관 관장 데이빗 로스, 뉴욕 MOMA 큐레이터 바바라 런던, 요나스 메카스를 비롯한 플럭서스 동료들, 그리고 한국인으로는 한용진, 김수자, 강익중 등 다수의 재미작가들과 서울로부터 날아간 다수의 문화계 인사들과 백남준 미술관 추진위원들이 참석하였다. 전설적인 요코 오노를 비롯해, 독일 브레멘 미술관장 볼프 헤르조겐라스, 스미소니언 미술관 관장 베티 브라운, 비디오 작가 게리 힐, 대지미술가 크리스토, 구겐하임미술관 큐레이터 존 핸하트 등 고인과 친분이 두터운 미술계의 주요 인물들이 연사로 참석했다. 한국측 연사로는 백남준 미술관 건립추진주체인 경기문화재단 송태호 대표이사(전임)가 초대되었다.
백남준의 서거를 애도하는 다수의 추모행사가 국내외적으로 개최되었다:
미국에서는 백남준 비디오테이프 공식 판매기관인 뉴욕 EAI (Elecronics Arts Intermix)의 추모행사 <Tribute to Nam June Paik>(2. 25, 10 am-10 pm)를 필두로, 구겐하임(Guggenheim Memorial: Nam June Paik Celebration, 4.26), MoMA(MoMA Video Tribute to Nam June Paik, NAM JUNE PAIK – IN MEMORIAM, 5.1-5.13), 아시아소사이어티(Projected Realities: Video Art from East Asia, dedicated to the memory of Nam June Paik, 8.6), WNET CHANNEL 13(Nam June Paik: Edited for Television, 6-7월), Tribeca Film Festival (A Tribute to Nam June Paik, 5.4/5.7)가, 그리고 LA County Museum of Art(Nam June Paik MEMORIAL 6.1-)의 추모 기념전이 열렸다.
유럽에서는 독일 브레멘 쿤스트할레 (Bremen Memorial to NJ Paik, 3.25), 영국 테이트갤러리(Magnetic Memory: A Day-Long Video Tribute to Nam June Paik, Merce by Merce by Paik 12시간 상영, 19736.10), 파리 퐁피두센터(Vidéo et Après : Hommage a Nam June Paik, 10.2), 츄리히의 쿤스트하우스(Nam June Paik Videos at The Expanded Eye 6.16-9.3), 스페인의 발렌시아(Observatori Festival, Nam June Paik Video Tribute, 5.5-5.7)와 바르셀로나(Nam June Paik Video Tribute, CaixaForum, 5.19/28; Nam June Paik Tribute, Loop Video Festival, 5.14-5.21)에서 추모행사가 열렸다.
그밖에 브라질 리오데자네이로(Nam June Paik Video Tribute, Rio de Janiero Institute of TV Studies, 6.1-6.30), 아르젠티나 부에노스 아이레스 (Nam June Paik Video Tribute, 5.19-24)와 시드니에서도 추모전이 열렸다. 일본에서는 동경 현대미술관(Tokyo Requiem for Nam June Paik, 2.26-3.8)과 이미지포럼(Nam June Paik Video Tribute, 동경, 교토, 후쿠오카, 요코하마에서 5.2-7.8)이 추모전을 개최하였다.
2006년 백남준상(Nam June Paik Award 2006)에 스페인작가 Abu Ali Toni Serra가 수상했다. 백남준상은 NRW 재단이 제정한 25.000 유로의 국제미디어아트 상이다. 이번에 세라와 함께 후보에 오른 총8인의 전시회가 Museum of Applied Arts Cologne에서 개최되었다.(9.2-11.12)
국내에서는 국립현대미술관의 백남준 추모특별전 <지상에서 영원으로>(3.18-6.24), 삼성리윰미술관의 <백남준에 대한 경의>(6.20-9.10)가 개최되었고, 수년간 백남준 공식 화랑이었던 갤러리 현대를 비롯해 다수의 화랑이 추모전을 개최하였다.
백남준미술관 건립을 준비하고 있는 경기문화재단이 고인의 49재를 기해 <백남준 스튜디오의 기억: 메모라빌리아>전 (5.11-6.10)을 국립고궁박물관 특별전시실에서 열었다. 경기문화재단이 확보하고 있는 70여점의 백남준 콜렉션 가운데 <TV부처>등 대표작 일부와 백남준의 브룸 스트릿 스튜디오 벽면을 재현한 기증작 <메모라빌리아>, 2285점에 달하는 비디오테이프 아카이브가 처음으로 공개되었다.
경기문화재단은 이 전시회에 앞서 5월 9일 49재에 때를 맞추어 백남준미술관 착공식을 거행 하였다. 백남준이라는 명칭을 가진 세계 최초의 미술관이 될 이 백남준미술관은 2001년 백남준과 경기도 간에 양해각서 체결로 그 건립이 가시화되게 되었다. 2003년 UIA 국제현상공모전을 통해 독일의 KSMS(크리스텐 쉐멜과 마리나 스탄코빅)의 아이디어가 당선되어 설계를 진행하고 있던 이 미술관을 보지 못하고 타계하였지만, 작가는 그 미술관에 대한 기대를 <백남준이 오래사는 집>으로 표현하였다. 백남준미술관은 2007년 가을 완공되고 2008년 봄 개관 예정이다.
▶︎ 2007년
<환상적이고 하이퍼리얼한 백남준의 한국비전>전 개최(2.13-5.20). 2007ARCO 한국 주빈국 행사의 일환이자 작가의 타계 일주년 기념 추모전으로 스페인 마드리드 텔리포니카 전시장에서 열린다. 경기문화재단이 공동주관하고 김홍희가 기획한 이 전시는 백남준의 작품 가운데 한국정서나 동양사상을 표현하고 한국의 역사적 인물을 재현한 작품들을 선정하여 코스모폴리탄 백남준에게 한국과 한국 사람의 의미가 무엇이며 작가는 그것을 어떻게 작품 속에 해석, 재현했는지를 보여 주고자 기획되었다. 선사상을 주제화한 <TV를 위한 선>, <필름을 위한 선>, <머리를 위한 선> 등의 “선” 연작, 작가의 트레이드마크이자 자화상과 같은 <TV 부처>, 멀티모니터 작품 <백팔번뇌>, <고인돌>, 그리고 <단군>, <무열왕>등 한국의 역사적 인물을 재현한 로봇 연작, <운송/소통>등 조각적 오브제, 그밖의 유화, 판화등의 평면작품을 포함해 이번 전시는 백남준 작품을 소장하고 있는 한국의 미술기관이나 애장가들로부터 대여한 70여점의 작품들로 구성된다.